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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15년 전 혈액암으로 돌아가셨다. 늘 다니던 동네 병원에서 감기치료를 했는데, 도통 낫지 않았다. 진단명이 나온 것은 대학병원 응급실로 옮긴 뒤였다. 30년 넘게 한국인 사망원인 1위가 암이지만, 내 아버지가 그 통계 수치에 포함되리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의 병상을 지키며 나는 끊임없이 ‘왜?’를 질문했다. 억울했다. 

병은 아버지에게서 제일 먼저 이름과 살아온 내력을 지웠다. 환자복을 입은 아버지는 ‘몇 호실 할아버지’였다. 병중에 겪는 모든 일들이 상상해보지 못한 것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아버지가 힘들어한 것은 무균실의 나날이었다. 항암치료 과정에서 면역력이 떨어져 비닐 장막이 쳐진 무균실에서 지내야 하는 일은 병으로 지친 몸에 고립이 더해지는 것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사람들의 따스한 격려가 필요한 때였지만, 아버지는 문병 온 친구와 악수조차 나눌 수 없었다.   

고삐가 잡히는 줄 알았던 코로나19가 지역사회 감염 국면으로 접어들어 위기 대응 단계 ‘심각’으로 강화되기까지 숨 가쁘게 전개된 지난 며칠간, 초조한 마음으로 뉴스를 보면서 자주 아버지의 투병기간을 떠올렸다. 

익명보장 때문이라지만 어떤 사람이었는지 모든 고유성이 지워진 채 번호로 불리게 된 확진자들.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적 삶의 기록이 ‘시민 안전을 위한 정보’라는 이유로 낱낱이 공개돼 인터넷에 떠돌아다닌다. 평소 같았으면, 가족끼리의 단란한 저녁식사, 오래 준비하고 꿈꿔온 해외여행이었을 소소한 일상이 위험을 자초한 몰지각한 일로 지탄받는다. 사람들의 화난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가 예기치 못했던 병을 얻었을 때의 억울했던 마음,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누구에게서든 설명을 듣고 싶었던 절박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를 묻는 사람들을 위해 급하게 만들어진 인과관계는 누군가를 표적으로 만들고, 뭇매 맞게 한다. 두려운 것은 사태가 심각해질수록 점점 더 상식이 있다면 뜯어말려야 할 뭇매를, 방관하거나 당연하게 여기는 태도가 확산되어 간다는 것이다. 누구도 감염될 위험을 배제할 수 없다면, 그 날선 공격들은 어느 날 내게 쏟아질 수도 있는데…. 

타인이 처할 위험은 아랑곳하지 않고 종교적 이유든 무엇이든 진단을 피해 숨거나  사실을 감추려 드는 이들을 역성들 생각은 없다. 그러나 원인을 추적하려는 과학적 역학조사와 바이러스를 옮긴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윤리적으로 평가하고 재단하는 일은 별개다.  

이렇게 사회적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 언론의 역할은 막대하다. 여론이 갈급히 정보를 내놓으라고 다그친다 해도, 사태해결에 정말로 필요한 게 아니라면, 가리고 살피고 자제해 보도해야 한다. 미증유의 사태를 겪으며 의료진만큼이나 기진맥진했을 것이 현장 취재기자들과 취재지시를 내리는 뉴스룸의 간부들이겠지만, 그렇다고 윤리적 판단을 그르친다면 상식 선이 무너진다. 기사 제목의 단어 하나, 서술어의 표현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될 수 있다. 언론의 프레임이 사람들의 선한 의지를 이끌어낼 수도 있고, 방향 잃은 분노나 공포를 증폭시킬 수도 있다.

환자들이 수용된 음압병동은 아버지가 있었던 무균실과 같은 격리시설이다. 아버지가 무균실로부터 벗어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원했던 것처럼, 지금 음압병동에 있는 확진자들도 순식간에 어긋나 버린 일상으로 간절히 돌아가고 싶은 사람들이다. 완치란 더 이상 감염시킬 위험이 없다는 의학적 판정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배제됐던 일상으로 이웃들의 환대를 받으며 돌아갈 때 완성되는 일일 것이다.

개인적 고립을 넘어 지역적 고립감으로 힘들 대구·경북의 이웃들을 생각한다. 누구보다도 따뜻한 지지가 필요할 그분들에게 #힘내요 대구경북!

<정은령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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