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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천안시 인근 태조산 산기슭에 위치한 계성원은 교보생명의 연수원이기도 하다. 여느 기업의 연수원처럼 바깥세상과 유리된 그곳은, 정문 앞 경찰이 쳐놓은 바리케이드와 현수막들과 취재경쟁이 전국 각지에서 시민참여단을 싣고 온 전세버스들을 맞이하느라 왁자지껄하였다. 이들이 2박3일간의 일정을 시작하면서 처음 본 것은 아마도 지나치게 큰 궁서체의 “경청”과 “숙의”라는 현수막이었을 것이다. 그 강당의 이름은 우연찮게도 ‘비전홀’이었다. 경청과 숙의라는 추상적이기만 한 원칙에서 출발하여, 공동체의 비전을 제시해야 할 어려운 임무가 이들에게 주어진 셈이었다.

2박3일 동안 꼬박 처음 만난 타인들과 정답 없는 토론을 이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일정을 시작하는 이들의 표정이 지나치게 상기되어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제는 그곳에서 벌어졌던 공론화조사가 신고리 5·6호기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는 누구나 알고 있다. 여기서는 다만 그 과정을 표면적으로나마 참관한 소회를 적고자 한다. 왜냐하면 공론조사의 핵심은 그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론조사 자체에 대한 여러 우려는 이미 많이 논의되었지만 그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전문성이 결여된 일반 시민들이 원자력과 환경 같은 고도의 ‘어려운 문제’와 관련된 복잡하고 수많은 변수들을 어떻게 다 이해하고 올바른 결정을 내릴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공론화 위원회가 선택한 워딩은 ‘471인의 현자(賢者)’였다.

그러나 나는 굳이 이들을 ‘현자’라고 부르지 않아도 충분했을 것이라고, 혹은 그렇게 부르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거리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일상을 살고 있는 평범한 이웃들이었으며, 누구나가 그런 것처럼 평소 원자력이나 환경에 대해 굳이 깊은 고민을 해 본 적이 없는 이들이었다. 다만 차이점은 참여단으로 선정된 한 달 동안 원자력과 환경과 자녀들의 미래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고민할 책무가 이들에게 주어졌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공론조사가 남긴 가장 큰 성과는, 정부와 정책을 좌우하는 전문가들이 비로소 ‘현자’가 아닌 일상을 사는 시민들을 상식의 언어로 설득하고 마음을 얻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사실을, 그러면서도 그것이 불가피하고 중요하다는 사실을 교훈으로 남겼다는 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모든 국가 정책의 비용을 감당할 이들도, 그리고 그 성공의 과실을 향유하거나 실패의 부담을 떠안을 이들도 결국 이들이며, 그것은 공론조사보다 훨씬 근본적인 문제기 때문이다. 비단 에너지 정책만이 아닌 모든 정책 영역에서 우리는 전지적이고 시혜적인 국가가 시민들을 ‘위해’ 보다 나은 정책을 알아서 수립하고 알아서 떠먹여주는 것에 너무 익숙했는지도 모른다.

2박3일 동안의 종합토론회 기간은 전체회의에서 전문가 발표를 들은 후, 열 명 남짓의 소그룹 분임토의를 통해 질문을 선정하고, 다시금 전체회의에서 전문가들에게 질의하는 형식이 반복되는 빽빽한 일정으로 채워졌다. 내 눈에 특히 띄었던 것은 이들이 식사시간에나 휴식시간에, 복도나 흡연실에서 삼삼오오 모여 의견을 나누는 모습들이었다. 낯선 타인들이지만 누구에게나 말 걸고 토론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울 수 있다는 것, 생각과 선호의 차이가 갈등과 반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토론과 새로운 합의를 향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갈등과 투쟁으로 점철된 민주주의라는 과정이 역설적이게도 공동체의 영속을 보장할 수 있는 비결이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번 공론조사의 가장 핵심적 결과는 59:41의 분할이 아니라, 최종결과가 본인의 의견과 다를 경우에도 이를 존중하겠다는 93.2%의 숫자였을 것이다.

아직 남겨진 숙제들 또한 만만치 않다. 대의민주제적 원칙으로 선출된 대표자들이 응당 짊어지고 가야 할 결정의 권한과 리더십의 책무를 어떤 장면에서 어떻게 숙의민주주의적 과정으로 ‘외주’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공론조사의 전체적 과정 즉, 여론조사 샘플링에서 참여단 선정까지, 전문가 그룹의 구성에서 분임 토의의 운영까지, 내가 소속된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의 검증위원회가 맡게 된 방대한 자료의 검토와 분석은 아직 시작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사실은 있다. 시민참여단이 성장한 만큼 우리도 성장하였고, 민주주의는 개인을 성장시키는 체제여야 한다는 점이다. 이제야 우리는 비로소 토론을 시작할 준비가 된 셈이다.

<박원호 서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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