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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이 새로운 시대정신이 되었다고들 한다. 이재명의 ‘성장과 공정’, 윤석열의 ‘공정과 상식’, 유승민의 ‘공정 소득’에 이어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공정한 경쟁’에 이르기까지 공정 담론이 넘쳐난다. 이제 공정의 뜻을 한번 되새겨볼 때가 되었다. 대니얼 카너먼은 심리학자이지만 행동경제학의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그 공로로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특히 그는 공정이라는 관념이 시장에서의 경쟁을 어떻게 촉진하거나 왜곡하는지를 집중적으로 설명했다. 공정한 경쟁을 주장하는 ‘이준석 현상’을 이해하는 열쇠 말이 될 수도 있다.

첫째, 준거의 정치학이다. 공정한지 아닌지는 비교의 기준, 즉 준거가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86세대는 사회를 지배자와 피지배자, 독재자와 민중, 제국과 식민지,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으로 인식했다. 당연히 그들의 준거는 지배자, 독재자, 제국, 자본가가 부당하게 취한 것을 빼앗아 피지배자, 민중, 식민지, 노동자에게 돌려주는 것이었다. ‘투기 세력’을 때려잡기 위한 부동산정책이나 ‘남성 지배’를 바로잡기 위한 여성할당제는 이런 생각의 연장선이다. 하지만 젊은 세대는 이러한 이분법적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의 준거는 안정된 삶에 다가가기 위한 기회를 주느냐 안 주느냐, 반칙은 있느냐 없느냐, 대가를 치러야 할 사람이 치르느냐 아니면 엉뚱한 사람이 치르느냐에 있다. 그들은 입시제도가 정의롭지 않다는 사실보다 지금의 제도하에서 반칙과 특권을 누린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들이 오히려 개혁이라는 거대담론을 말한다는 사실에 더 분노한다. 부동산으로 큰돈을 번 사람이 있다는 사실보다 내가 집을 살 수 없다는 사실에 더 분노한다. 남성 지배 사회의 특권을 누릴 만큼 누린 86세대가 그 대가를 젊은 세대에게 지불하게 하는 사실에 더 분노한다.

둘째, 코딩의 정치학이다. 같은 일이라도 플러스로 코딩되느냐, 마이너스로 코딩되느냐에 따라 공정함의 판단은 달라진다. 사람들은 마이너스 코딩에 훨씬 민감하다. ‘적폐청산’으로 상징되는 86세대의 정치는 과거를 바라보는 마이너스 코딩의 정치이다. 그들의 문법은 거대 악을 설정하고 그 악과 싸워 이기는 것으로 프로그램화되어 있다. 때로는 작은 악이 거대 악으로 포장되어 청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 거대 악이 모두의 삶을 실제로 옥죄고 있다면 그들은 영웅이 된다. 1980년대의 군부독재가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공유된 거대 악을 찾기가 예전만큼 쉽지 않다. 왜 검찰개혁에 공감하는 시민은 강경 지지그룹 외에는 찾기 어려울까. 검찰의 악을 대부분의 시민들은 별로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악이 실제로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시민들이 공유하지 않는 악을 청산한다고 몰두할 때, 사람들은 하라는 민생은 안 하고 뭐하는 짓이냐고 외면한다. 1985년생인 이준석은 청산할 악이 없다. 과거를 돌아보지 않아도 되니 그의 말은 플러스 코딩되고, 그것은 사람들에게 실용적이고 합리적으로 들린다.

셋째, 경쟁의 정치학이다. 수요가 많다고 가격을 올리는 시장의 법칙은 어떤 때는 허용되고, 어떤 때는 허용되지 않는다. 시장거래가 활발하고 가치를 보존하는 상품에는 가격을 인상해도 공정을 해친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주식이나 주택으로 대박을 낸 사람들은 부러움과 시기의 대상이 될지언정 불공정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하지만 주말 저녁 예약이 많다고 해서 가격을 올리는 레스토랑은 비난의 대상이다. 안정된 직장은 그 자체가 금처럼 가치를 보존하는 상품이 되었다. 이런 직장에 취직이 확정되는 순간 인생은 업그레이드되기 때문이다. ‘이대남’이 경쟁시장을 요구하는 이유이다. 할당제를 폐지하자는 이준석이 능력주의자라고 비판하는 순간 이준석만큼의 능력을 갖추지 못한 대다수의 이대남은 그에게 속은 것이 된다. 정말로 속았을까. 나는 이준석이 경쟁의 정치학을 잘 읽었을 뿐이라고 본다.

넷째, 처벌의 정치학이다. 공정은 독점의 횡포를 용납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불공정한 독점자를 처벌하고 싶어한다. 불매운동이 대표적이다. 180석 가졌다고 상임위를 독식하고 국회를 일방통행하는 것은 사람들의 처벌 욕구를 증가시킨다. 탄핵 정당에 표를 주는 것은 이러한 처벌 욕구 때문이다. 탄핵은 정당했다는 과감한 주장은 여당에 대한 처벌 욕구에 기름을 끼얹는다.

절대적인 공정은 없다. 여러 종류의 공정들이 경쟁하고 있을 뿐이다. 이준석의 승리는 이 게임이 1-0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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