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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논란에 대해 언론에 나온 해결책은 대부분 무책임하다. 예를 들어 수능 복수 시행에 관한 제안이 그렇다. 단 1점 차이에도 민감하기 마련인 우리의 입시 현실에서 복수로 시행하는 수능시험들의 난이도를 동등하게 맞출 길이 있을까? 이제 정말 큰 틀을 바꿔야 할 때가 왔다. 그러나 쉽지 않다. 그 까닭은 우선 근본적인 원인이 교육이 아니라 사회에 있기 때문이다. 악화일로의 사회적 양극화 앞에서, 어느 대학 어느 학과에 합격하느냐가 인생을 좌우한다고 다들 생각한다. 대학입시라는 줄세우기 싸움에서 앞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믿음이 우리에게 유전자처럼 박혀 있다. 게다가 관련 당사자들의 입장과 이해관계도 크게 엇갈려 사회적 합의도 어렵다.

이 같은 난국을 뚫고 나가려면 두 가지가 동시에 필요하다. 우선 교육현장에서 밑으로부터 불고 있는 새 바람, 진보교육감의 괄목할 만한 진출로 입증된 새 기운을 잘 북돋워야 한다. 각 지역에서 고교 평준화를 다지고 확대하면서, 의미 있는 변화를 축적해야 한다. 개별 학교와 일선 교사의 열정과 창의성을 바탕으로 한 혁신을 확대함으로써 대학, 기업, 사회가 기존의 타성을 버리고 변화를 받아들일 여지를 넓혀야 한다. 물론 아래로부터의 움직임만으로는 부족하고, 위로부터의 적절한 호응이 필요하다. 그것은 대학 서열구조를 허무는 대학 개혁이며, ‘국립대학 연합체제’ 방안이라고 부를 수 있다. 계획의 골자는 서울대를 포함한 국립대학들의 적절한 통합 운영을 통해 대학에서도 판을 치는 학점과 스펙 경쟁을 배제하고 공부다운 공부가 이루어지는 고등교육의 장을 만드는 것이다. 지방 국립대학을 내실화하고 특성화함으로써 정부의 시장주의적 대학 구조조정의 부작용을 피하고, 지역경제를 살림으로써 수도권 편중의 국가운영이 지닌 폐해를 넘어설 수 있다.

장기적으로 서울대 수준의 종합대학 10여개를 전국에 골고루 만들어낼 수 있다. 5000만명의 인구에 세계 10위권 경제를 가진 나라가 이것을 해내지 못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미술대학 실기전형을 한 달여 앞둔 30일 오후 서울 홍익대 인근 미술학원에서 한 수험생이 실기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지난 대선에서 야당이 유사한 안을 검토하자 일부 언론은 이를 ‘서울대 폐지론’의 프레임에 걸어 좌초시켰다. 그러나 이 길은 서울대도 살리는 방법이다. 왜냐하면 서울대에서 점수 따기의 귀재는 인기 전공만 찾거나 고시에 몰두하고, 대학다운 공부를 열망하는 잠재력 있는 학생은 방향을 잃은 학부교육 탓에 좌절하고 방황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자연히 대학원에 진학하는 학생이 양적, 질적으로 줄어들어 서울대의 연구 기능은 이미 심각한 장애를 겪고 있다.

구체적인 예를 하나만 들자. 교육부의 정책 변화에 따라 10여년 만에 대학들은 학부제 모집에서 학과별 모집으로 회귀하고 있다. 연구·교육 단위로서 학부가 정착된 극소수 사례를 제외하고 사실상 학부제는 실패한 것이다. 그러나 급변하는 현실의 새로운 도전에 맞서야 할 때에 젊은이들을 학과별로 묶는 것은 과거의 갖가지 한계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만약 연합체제에 참여한 대학 교수진의 깊은 논의를 통해 준비된 분야부터 적정한 규모의 공동선발을 하고 해당 분야에서 대학끼리 치열하게 경쟁하게 만든다면, 학생의 숨은 잠재력이 발휘되어 몇 년 안에 놀라운 성과를 낼 수 있다. 대학 내에 소모적인 학점 경쟁이 아닌 건설적이고 창조적인 경쟁이 자리 잡는 것이다. 이 점에서 ‘국립대학 연합체제’ 안은 결코 무모한 ‘평준화론’이 아니다. 또 대학에 학생 선발의 완전한 자율권을 달라는 말로 포장된 사회 일각의 ‘본고사 부활론’, 즉 1%의 성공을 위해 99%를 더 큰 고통과 희생에 빠뜨리는 길과도 질적으로 다르다.

장애물은 많다. 자칫하면 예산 낭비와 혼란 속에 교육관료의 권한만 커지는 최악의 결과도 예상할 수 있다. 한국 교수집단의 자발적인 열정과 헌신을 이끌어낼 때만 성공할 수 있다. 우리 교수들을 믿을 수 없다고? 맞다. 현재는 같은 교수인 나도 확신이 부족하다. 그러나 실제로 일을 해내야 할 사람은 이들이다. 무엇보다 이들도 학부모임을 기억하자. 다음 총선과 대선에서 진정으로 승리를 원하는 정치집단은 지금부터 범사회적 논의를 주도할 채비를 해야 한다.


김명환 | 서울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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