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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70년이 코앞인 지금도 우리가 국내 대학에서 가르치고 연구할 교수 양성을 해외에 크게 의존하고 있음은 잘 알려져 있다. 국내 교수진에서 미국 등 외국 박사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은 것은 한국 대학의 핵심 기능이 정상이 아님을 입증한다. 국내 박사가 찬밥 신세이니 국내 박사과정에 대한 투자는 외면당하고, 배출되는 인력의 수준도 저하되어 차별과 취업난이 심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해결의 실마리는 박사과정 생활장학금이다. 국내 대학원의 난국은 투자 부족과 푸대접 탓이다. 인문사회과학의 경우 국내 박사과정보다 해외 유학이 더 싸게 먹힌다. 우수한 한국 학생이 가령 미국 대학원에 입학할 때 대개 생활비를 포함한 장학금을 몇 년간 보장받는다. 아니면 1, 2년 후에 강의조교나 연구조교가 되어 학비를 해결할 수도 있다. 이에 비해 국내 박사과정은 등록금 면제도 어렵고, 예비학자로서 훈련을 겸하는 장점을 지닌 강의조교나 연구조교도 따기 힘들다. 따라서 대다수 학생이 부업으로 생활비를 버느라 학업에 집중하지 못한다. 결국 너나없이 태평양을 건너는 징검다리 역할을 빼면 국내 대학원은 껍데기꼴이고, 우리 역사와 현실에 뿌리박은 독자적인 학풍 건설은 꿈에서나 그릴 얘기가 되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세계화의 바람을 타고 대학의 국제경쟁력 강화가 화두가 되어왔다. 하지만 국내 박사의 경쟁력이 해외 박사와 어깨를 견준다고 공인받는 경우는 아직 자연과학, 공학의 일부 대학과 학과에 국한된다. 이들은 정부 지원과 산학협력 덕택에 등록금 면제와 함께 월 생활비까지 주며, 박사 취득 후 교수가 되기까지 몸담을 박사후과정도 모양을 갖추고 있다. 우수한 인재가 국내에서 안정된 조건에서 국제수준의 연구를 해내는 것이다. 인문사회과학도 생활장학금이 한시바삐 생겨나야 동일한 효과를 노릴 수 있다.

인문학 책이 빼곡히 꽂혀있는 한 도서관 (출처 : 경향DB)


물론 당장 우려가 쏟아질 것이다. 돈을 준다 해도 기성 교수진이 국내 대학원의 질적 도약을 위해 분골쇄신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거의 모든 대학에 있는 해당 분야 대학원에 예산을 나눠줄 객관적 기준도 없고, 잘못하면 가수요와 잠재수요만 자극해 거품을 키우지 않겠는가? 반값등록금 이슈로 부각된 과중한 대학 학비 문제에 비하면 박사 생활장학금은 한가한 주장 아닌가? 모두 타당한 의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생활장학금을 포기할 이유가 아니라 제도 정착을 위해 해결할 과제이다.

투자 부족과 열악한 교수·학생 비율 탓에 우리 학부교육은 그야말로 대강 대강이다. 교양과정의 글쓰기 교육을 보자. 우리말로 조리있게 글을 쓸 자신이 있는 학부 졸업생은 많지 않다. 글쓰기는 단순히 ‘스킬’ 습득으로 향상되지 않으며, 독서와 토론, 사고훈련 등 종합적이고 내실있는 교육이 따라야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영어를 그토록 강조했건만 사회초년병이나 예비학자로서 필요한 영어 글쓰기 능력을 갖춘 이도 태부족이다. 이 모두가 투자와 더불어 치밀한 학사관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사과정생이 생활장학금을 받는 대가로 훈련을 거쳐 학부 교육에 기여하면, 교육의 질이 개선되는 동시에 예비교원의 수준도 자연히 높아진다. 또 주로 기초교양교육에 투입될 이들의 노력 덕분에 인문사회과학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미래에 활약할 인재의 기초체력이 강화된다. 학부 교육과 대학원 교육이 선순환 과정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는 부실한 교육과 박사 취업난이 맞물리면서, 졸업생의 자질에 대한 사회적 불만도 계속되는 가운데 좋은 인재는 갈수록 학문과 교육의 길에 등을 돌린다. 기초학문 대학원의 몰락과 열악한 학부 교육은 동전의 양면이다.

재정 확보는 가능하다. 당장 사립대학의 자산과 적립금은 계속 쌓여가고 있고, 정부는 각종 사업성 교육예산을 정비하기만 해도 상당한 재원을 만들 수 있다. 생활장학금(그리고 적절한 박사후과정)으로 교육의 기초를 다지면, 머지않은 장래에 유능한 국내 박사가 외국 대학의 교수로 초빙되는 일이 더 이상 뉴스거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인구 감소를 핑계로 대학교수 자리를 무작정 줄이려드는 대신 우리 사회는 이런 꿈을 가져야 한다.


김명환 | 서울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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