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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 시장은 파격적이었다. 팬터마임 연기자 수백명을 거리에 풀어 불법 운전자와 무례한 보행자를 놀려주도록 했다. 시민들에게 레드카드를 나눠주고 화가 났을 때 폭력으로 대응하는 대신 레드카드를 뽑아들도록 했다. 부정부패와의 전쟁을 선언하는 한편, 시민들에게 총을 자진 반납하도록 하고 그것을 녹여 숟가락을 만들었다. 공공서비스를 늘릴 테니 재산세를 10% 더 내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놀랍게도 6만가구가 자발적으로 세금을 더 냈다.

1995년 콜롬비아 보고타시에서 벌어진 실제 상황이다. 지난 세기 후반 보고타는 세계 최악의 도시라는 오명을 얻었다. 수십년간 지속된 내전으로 800만 시민의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1995년 한 해에만 3300여건의 살인사건이 발생했고 그해 8만명의 난민이 시 외곽 슬럼가로 몰려들었다. 그런데 시장이 바뀌자 도시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시장이 바로 안타나스 모쿠스. 학자 출신인 그는 도시를 ‘마음’이라고 보고 시민정신을 회복시키고자 했다. 그는 ‘인간의 삶에 대한 존중’이 시민의 최고 권리이자 의무라고 생각했다.

더 놀라운 것은 다음 시장이었다. 모쿠스에 이어 당선된 엔리케 페날로사는 도시의 ‘몸’ 만들기에 주력했다. 페날로사 시장은 행복을 재정의했다. “우리가 더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새들이 날아다녀야 하듯, 인간은 걸어다녀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아름다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자연과 접촉해야 합니다. 우리는 소외당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과 평등하다는 감각을 느끼는 것이 필요합니다.” 행복의 심리학, 행복의 사회학을 도시 생활에 접목시킨 것이다.

보고타의 행복은 개발(성장) 논리와 거리가 멀었다. 페날로사는 시장 취임식에서 “인간을 존중하는 도시만이 시민들에게 존중받을 수 있다”고 선언했다. 시장은 도시를 새로 디자인하면 부의 많고 적음, 신분의 높고 낮음과 무관하게 모든 시민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고가 고속도로 건설 계획을 접고 대중교통 시스템을 혁신하기 시작했다. 빨간 립스틱을 칠한 것 같은 굴절 버스를 중앙차로에 올려놓았다. 이것이 전 세계 도시로 확산된 ‘트랜스밀레니오’다.

페날로사는 시내 곳곳에 600개에 달하는 공원을 조성하고 나무 10만그루를 심었으며 도서관을 세웠다. 그에게 공공서비스 확충은 곧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이었다. 그는 “도시의 모든 부분은 인간이 신성한 존재라는 사실을 반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결과 시민들의 생각이 바뀌었다. 보고타 시민의 4분의 3이 미래를 낙관했다. 세계 최악의 도시가 세계적인 행복도시로 거듭난 것이다.

콜롬비아 보고타의 저녁 (출처 : 경향DB)


이상의 꿈과 같은 드라마는 지난봄에 나온 찰스 몽고메리의 탐사보고서 <우리는 도시에서 행복한가>(윤태경 옮김, 미디어윌 펴냄)의 후반부에 상세하게 소개돼 있다. 안타깝게도 보고타의 신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트랜스밀레니오가 민영화되면서 불편이 가중됐고 시민들의 낙관주의도 감소했다. 하지만 보고타가 보여준 혁신은 행복을 꿈꾸는 전 세계 도시의 희망으로 자리 잡기에 충분했다. “모든 시민의 경험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도시를 디자인하면 모든 시민의 생활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보고타의 실험은 도시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뒤흔든다. 모쿠스와 페날로사의 도전은 급진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소박하고 단순한 것이다. 코펜하겐, 뉴욕, 파리, 밴쿠버 등 전 세계 주요 도시가 추구하는 행복도시의 핵심 가치는 ‘인간 존중’이다. 자동차보다 보행자를, 도로와 건물보다 공원과 녹지를 우선하는 도시가 행복도시다. 공유재가 많은 도시가 행복도시다. 하지만 정책 못지않은 필수 요건이 있다. 시민의 각성이다. 시민이 도시에 대한 권리를 적극 행사해야 한다. 안전하고 공정하며 아름답기까지 한 행복도시는 행복하게 살겠다는 시민의 희망에 의해 실현된다.

돌아보자. 우리가 사는 도시는 누가 만들었는가. 그리고 캐묻자. 우리는 도시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느끼는가. 우리는 과연 어떤 도시에서 살고 싶어 하는가. 이런 질문을 하는 시민이 많아질 때, 도시는 바뀌기 시작할 것이다.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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