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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여성 리더들의 애환을 가까이에서 접하게 된다. 개인이 최대한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가 걷히고 나면 남성들에겐 다른 사다리가 기다리지만 왜 여성들은 허공과 맞닥뜨리게 될까. 갈등과 직면하면 왜 여성들의 고군분투는 더 독해질까. 남성은 결정만 생각하면 되는데 여성은 왜 비판에 대처하는 방법까지 고려해야 할까. 여성에 대한 시선은 남성이 지배하는 분야에서 성공했다 추락했을 경우 훨씬 가혹해진다. 여성 리더가 편안하게 갈 수 있는 ‘노란 벽돌길’(<오즈의 마법사> 중 도로시의 길)은 애초부터 없었기에.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브렉시트 협상을 위한 새로운 제안을 제시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여성 개인의 결함이 여성 전체의 결함으로 치부되는 현실은 새삼스럽지 않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브렉시트 문제로 사임을 발표하며 눈물을 흘렸다. 감정을 감추는 데 익숙한 영국 문화도 작용했겠지만 메이 총리의 눈물을 두고 나약한 지도자라는 비아냥이 붙었다.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원내대표는 두번의 세월호 재협상과 이상돈 당시 중앙대 명예교수 영입과정에서 당내 반발에 부딪힌 뒤 칩거했다. 탈당설까지 돌 무렵, 박 원내대표의 복귀 소식이 알려지자 기자들은 분주해졌다. 다른 언론사 후배가 하소연을 했다. “회사에 보고했더니 ‘(박 원내대표) 성질 좀 죽이라고 해라’라는 말부터 하더라고요. 아니, 복귀 메시지가 뭔지 물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남성 원내대표였다면 그 선배는 ‘성질’ 얘기부터 했을까.

반면, 2007년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전쟁 영웅 가족들에게 훈장을 수여하며 눈물을 보였을 때 언론은 “백악관이 원하는 것”이라고 했다. 남성이 울면 개인 감정으로 존중하면서, 여성이 울면 여성 전체를 감정적인 존재로 몰아가는 것이다. 여성이 이성보다 감정에 압도될 것이라는 시선으로 보기 때문이고, ‘감정적’이라는 평가는 여성의 결정을 깎아내리려 할 때 빈번하게 사용되곤 한다.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조직의 결정적 위기 때 상당수 여성 리더들이 등장하는 현실을 주목해보자. 미국 인지심리학자 터리스 휴스턴은 <왜 여성의 결정은 의심받을까>에서 이 현상을 ‘유리절벽’이라고 표현했다. 유리천장을 부수고 올라온 ‘성공한’ 여성이 남성보다 ‘위험 부담’이 큰 지도부에 오른 경우를 빗댄 말이다. 얼마 전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독일 국방장관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이민 문제 등으로 위기에 놓인 유럽연합(EU)의 첫 여성 집행위원장에 지명됐다. 남성 전임자가 성폭행 혐의로 사임한 뒤 선출된 국제통화기금(IMF) 첫 여성총재 크리스틴 라가르드도 있다. 제너럴모터스의 첫 여성 CEO 메리 배라는 임명된 지 몇주 만에 자동차 수백만대를 리콜하는 악재와 만났다. 조사 결과, 자동차에 치명적 결함이 있었음을 회사 측은 진작에 알았다고 한다. 휴스턴은 이 사례를 통해 ‘어떤 방법도 효과 없을 때가 여성의 조언을 구하기 가장 좋은 시기일까’라고 되묻는다. 아니다. 조직 번영기에 더 많은 여성이 의사결정자가 되면 소소한 스트레스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고 휴스턴은 충고했다.  

우슐라 폰 데르 레옌 독일 국방장관이 독일 베를린의 연합 박물관에서 열린 베를린 독립 70주년 기념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성 리더들에겐 이처럼 전형적인 경로가 있다. 남성들이 ‘이미 정해둔’ 기준에 따라 평가되고, 해석되고, 결국 권력도 덜 쥐게 된다는 것. 그래서 여성이 아무리 남성적 리더십을 보여도 의심받게 된다는 것. 여성 리더가 ‘왜 여성의 결정은 의심받을까’란 자각이 없을 때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는지는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를 보면 알 수 있다. 나 원내대표는 숱한 막말 의혹에 반박 강박증을 드러내는 ‘프레임’이란 용어를 자주 끌어온다. 문재인 정부를 ‘신독재’로 규정한 것이 대표적이다. 퇴행적 정치관을 드러내는 사례도 잦다. 필라델피아 선언(‘노동은 상품이 아니다’)이 발표된 지 75년이 지났음에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노동자유계약제’를 버젓이 주장했다. (남성들보다) 더 남성적으로, (보수의 언어보다) 더 보수적으로 발언하는 이유가 여성 리더라 위태로워 보인다는 불안을 더 극렬한 남성화로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해서일지 모르겠다. 패스트트랙 정국 때 여야 합의안이 한국당을 거치면 혹이 더 붙거나 부결됐다. 당내 혼란이 불거지면 통상 중진들이 수습에 나서곤 했다. 그러나 이번엔 거의 손을 놨다. 나 원내대표가 총선 공천권을 쥔 지도부인데도 말이다. 이는 (나 원내대표가 여성이라) 제어 가능하다고 보거나, 혹은 무시해도 생존 가능하다고 확신해서라고 봐야 한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13일 국회에서 열린 재해 및 건전재정 추경 긴급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권호욱 선임기자

보수정당의 절체절명 위기에 거머쥔 첫 여성 원내대표라는 타이틀이 나 원내대표 스스로를 ‘특별한’ 여성 리더로 여기도록 부추기지 않았는지 돌아볼 때다. 과거 여성 리더들에게 가해졌던 비판을 상기해보라. 정치적 역량이 한계에 부딪혔을 때 가장 먼저 ‘여성’이 소환되지 않았던가. 보수정당 첫 여성 원내대표라는 타이틀이 ‘특별한’ 것이 아닌 ‘여성’이라는 표지임을 자각해야 하는 까닭이다. 이는 여성 리더 ‘나경원 정치’의 가치와도 직결되는 문제다. 나 원내대표만 갈 수 있는 권력의 직항로, ‘노란 벽돌길’은 그 어디에도 없다.

<구혜영 정치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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