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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저택에 널따란 정원을 가진 한 거인이 있었다. 거인이 집을 비울 때면 가난한 동네 아이들은 정원에서 뛰어놀았다. 일곱 해 동안 집을 비우고 돌아온 거인은 ‘불법침입한’ 아이들을 정원에서 내쫓았다. 아이들이 사라진 정원엔 매서운 북풍만 몰아쳤다. 어느 날, 거인의 정원에 다시 꽃이 피고 새가 날아들었다. 담벽 사이 구멍 안으로 아이들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거인은 그제야 알았다. 그의 정원에 봄이 오지 않은 이유를. 망치로 담장을 부수고 다시 아이들을 맞아들였다. 

오스카 와일드의 ‘저만 아는 거인’이다. 지난주 두개의 담장이 한반도를 에워쌌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냉전의 담장을 깨는 동안, 황교안 대표를 선택한 자유한국당은 냉전의 담장을 쌓아 올렸다. 

북한과 미국의 두 거인은 평화를 확약하는 도장은 찍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정원을 조금씩 내주며 담장 허물기에 나섰다. 트럼프 대통령은 제재 압박을 더 할 것이냐는 ‘대한민국’ 기자의 질문에 “북한 사람들도 살아야 하지 않겠나”라고 답했다. 김 위원장은 하노이를 오가는 열차 안에서 한반도의 운명을 생각했을 테다. 비핵화는 전 세계가 머리를 맞대야 하는 실존의 문제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앞줄 왼쪽)와 조경태 최고위원(오른쪽) 등 지도부가 5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하고 사저에서 권양숙 여사를 예방한 뒤 걸어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2·27 전당대회에서 한국당은 황교안체제를 택했다. 담장은 더 높아졌다. ‘5·18 망언’에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태블릿PC 논란이 한겹 더 에워쌌다. ‘태극기부대’만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전대 후, 한국당 거인(황교안)은 성찰 대신 좌파독재만 외치며 온통 남탓만 하고 있다. 

오죽하면 한국의 위기가 아닌 보수의 위기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아질까. 그렇다고 이 송곳 같은 현실이 보수세력 홀로 견딜 문제도 아니다. 보수가 붕괴되면 진보는 우경화의 유혹에 빠진다. 진보개혁 진영이 20년 집권을 외치는 동안 관료와 시장이 권력의 지분을 넓히고 있다. 정치의 후퇴다. 세번의 선거 패배 후 2005년 ‘보수주의자의 보수 비판’이라 이름 붙여진 책 <한국의 보수를 논한다>를 꺼내들고 굳건한 담장 옆에 섰다. 14년 전 보수의 석고대죄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당시 박효종 서울대 교수는 ‘보수주의자들의 일곱 가지 죄’를 고하며 고개 숙였다. 첫째,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죄’다. 한국당은 대법원마저 ‘국가권력을 무력 찬탈한 반란군 대 헌정질서 회복을 위해 싸운 시민’의 대립으로 판결한 5·18민주화운동에 빨간색을 입혔다. 황교안 대표는 “유공자 명단을 가려내야 한다”고 하더니 취임 후엔 좌파독재저지특위를 만들고 안보무장해제 투쟁운동을 선포했다. 지금은 적대국가 북한과 미국이 한반도의 평화를 논의하는 시대다. 내년 총선은 북한 변수 없이 치러지는 첫 선거가 될지 모른다. 

두번째는 ‘과거의 향수를 살리지 못한 죄’, 세번째는 ‘지키기만 하고 가꾸지 못한 죄’다. 황 대표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태블릿PC 진위 논란을 주도했다. 법무부 장관 출신이 법치주의를 부정한 꼴이다. 권력이 결정하면 법이 곡학아세하던 시대를 아직도 그리워한단 말인가.

‘권위와 권위주의를 혼동한 죄’, 네번째 죄다. 지금 광화문광장은 ‘시대 불화’의 장소가 됐다. 냉전 보수세력들이 애국이란 이름으로 태극기를 휘날리고 있다. 한때 한국 보수는 반공 대신 자유를 강조하며, 대북 안보 일변도에서 벗어나려 했다. 다시 반공의 깃발을 든 것이다. 조금이라도 자신들과 다르면 악으로 치부하면서 말이다. 한국당은 이런 태극기부대에 엄청난 정치적 권위를 부여했다. 

다섯째는 ‘특권 오·남용의 죄’다. 황 대표는 고검장에서 물러난 후 대형로펌에서 17개월 동안 월 1억원을 받았다고 한다. 수임사건 19개 목록은 공개되지 않았다. ‘자기초월을 못한 죄’가 여섯번째다. 황 대표 스스로 쟁취한 정치가 무엇인지 아직 모르겠다. 보수의 새 가치는커녕 현안 대응조차 어정쩡하다. 5·18 망언 징계를 요구하는 여론에 “과거를 접고 미래를 보자”는 말만 되뇐다. ‘대통령권한대행 국무총리 황교안’이 새겨진 자개 명패가 떠올랐다. 특검 연장 요구가 빗발치던 때 자개 명패, 기념시계를 만들어 의전놀이에 빠졌던 국무총리, 그 사람이 한국당 대표가 됐다. 이번엔 제1야당 대표를 차기 대선용 자개 명패로 삼고 있는 건지 모를 일이다.           

마지막은 ‘베풀지 못한 죄’다. 아래를 내려다볼 줄 모르는 정치는 뺏길 일밖에 없다. 지방분권, 균형발전 정책만 해도 기득권의 독점을 깨려는 선전포고 아니겠는가. 사려 깊지 못하고, 민심을 헤아릴 줄 모르는 것도 ‘정치’를 베풀지 않은 죄다. 황 대표는 정의당을 방문해 첫 인사를 하며 드루킹 댓글 사건을 건드렸다. 전대에선 차디찬 민심을 확인했다.  

한쪽은 허문 담장 위로 봄을 불렀고, 한쪽은 단단한 담장을 타고 다시 겨울로 들어갔다. 한 뼘만 허물면 봄볕이 스며들 텐데. 기어이 수구의 긴 겨울을 보내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저만 아는 거인’에서 ‘저만 아는 소인’으로 왜소해지는 건 시간문제다.

<구혜영 정치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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