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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어둠이 걷히지 않은 푸르스름한 새벽은 무겁고 고요했다. 총총히 걷는 어느 사람의 입김은 흰 연기가 돼 흩어졌고, 간혹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는 소리 없이 전조등 불빛과 함께 멀어졌다. 서울로 가는 첫차 시각에 맞춰 전철역으로 걸어가는 이들의 움직임은 빨랐지만 부산하지 않았다. 작은 백팩을 등에 진 이들은 일정한 보폭으로 걸음을 떼었고, 역에 닿자 이제 막 첫 운행을 시작했을 에스컬레이터에 꼿꼿하게 올라섰다. 그렇게 역 승강장에 하나둘 모인 사람들은 젊은이들이 아니었다. 깊게 눌러쓴 모자 밑으로 삐져나온 머리칼은 하얗게 세어 있었고, 눈가와 입가에는 굵은 주름이 패어 있었다. 날이 추워 무릎 보호대를 하고 나왔더니 벌써 갑갑하다는 노인은 더 나이든 노인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 사람, 거기 갔던가요? 거기가 다른 데보다 수월하다고 말은 해줬는데…….”

“어제 오긴 했는데, 오는 길이 쉽지 않다고 망설이더라고요. 여기가 워낙에 오르막길이라서.”

그들의 대화는 전철 안에서도 이어졌다. 그리고 그 칸에 이미 타고 있던 사람들도 그들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말을 거들었다. 설핏 보면 그들은 함께 여행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이 가는 곳은 아직 깨어나지 않은 도시 한복판일 것이다. 그들은 휘적휘적 차가운 새벽 공기를 뚫고 가서 도시의 건물에 불을 밝힐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능수능란하게 도시 구석구석에 쌓인 퀴퀴한 냄새와 흔적을 깨끗하게 치워버릴 것이다. 그들이 없다면 도시는 어제를 지우고, 오늘을 새롭게 시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도 수고하십시오!” 감기 때문에 며칠 고생했다는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한 손을 번쩍 들어 인사했다. 그렇게 그들은 하나둘 다른 전철역에서 내리며 헤어졌다. 아마 그들은 내일도 새벽 첫차에서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서로의 수고로움을 인사할 것이다. 그러나 어쩌다 새벽 첫차를 타고 하품이나 쩍쩍해대는 나는 그들의 수고로움을, 그들이 여전히 우리와 함께 달리는 동행인임을 또 까맣게 잊을 것이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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