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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월29일, 현직 여성 검사가 생방송에 출연해 검찰 고위간부로부터 성추행을 당하고 인사 불이익까지 겪었다고 폭로했다. 서지현 검사의 증언은 국내에서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 운동이 본격 발화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도도한 미투의 물결은 문화예술계와 정치권, 대학 등 전방위적으로 확산됐다. 최근에는 빙상·유도·축구 등 체육계에서도 미투가 이어지고 있다. 고통 속에 침묵해오던 성폭력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면서 ‘가해자 연대’는 해체되기 시작했다. 23일 법원이 서 검사에게 성추행·인사보복을 한 안태근 전 검사장을 엄중히 단죄한 것은 거대한 변화의 흐름에 대한 응답으로 읽힌다.

서울중앙지법은 안 전 검사장에 대한 1심에서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안 전 검사장은 법무부 검찰국장이던 2015년 자신이 성추행했던 서 검사가 여주지청에서 통영지청으로 발령되는 과정에 부당하게 개입한 혐의(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로 기소됐다. 재판부는 안 전 검사장이 2010년 서 검사를 성추행한 사실을 인정하고, 안 전 검사장도 이를 인식하고 있었다고 봤다. 이후 안 전 검사장이 검찰 내에 성추행 사실이 알려질까 우려해 인사 불이익을 줬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다. 실형 선고 이유와 관련해선 “비위를 덮으려 지위를 이용해 부당한 인사로 불이익을 줬고, 이로 인해 피해자에게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가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대법원은 미투 운동이 본격화한 이후 성범죄 소송에서 ‘성인지(性認知) 감수성’을 견지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한 바 있다. 피해자가 성폭력 사실을 문제 삼는 과정에서 가해자 중심적 문화에 따른 2차 피해를 입을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 검사 역시 ‘인사에 불만을 품었다’ ‘업무능력에 문제가 있었다’는 등 근거 없는 음해에 시달렸다. 법원이 성인지 감수성을 토대로 판단하고 양형한 것은 권력을 남용해 폭력을 저지르는 이들을 향한 경고이자, 피해자들에 대한 위로가 될 것이라 믿는다.

서 검사는 지난해 11월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제가 바라는 세상은 미투가 번지는 세상이 아니라 미투가 필요 없는 세상”이라고 말했다. “한 사람이 진실을, 정의로움을 얘기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시대는 끝나야 한다”고도 했다. 옳은 말이다. 용기 내어 진실을 외치는 피해자들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들의 용기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차별과 폭력의 고리를 끊는 일은 사회 전체의 몫이 되어야 한다. 법원의 이번 판결이 한국 사회의 성차별적 인식과 구조를 깨는 변화의 밑거름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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