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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께서 하시던 자전거포 옆에 책방이 들어선 건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다. 과자나 신발처럼 책을 파는 가게도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약방, 미곡상회, 신발가게, 비료가게, 철물점, 솜틀집, 기름집이 늘어서 있는 장터 초입에 들어선 책방의 주인은 젊은 부부였다. 둘은 번갈아가며 책방을 지켰고, 나는 가게가 한가하다 싶으면 슬그머니 들어가 책 구경을 했다. 소년·소녀의 영원한 세계의 명작 문고 <부활>은 내가 가장 좋아한 책이었다. 나는 주인아주머니가 허락해준 만화책을 보는 틈틈이 <부활>을 슬쩍슬쩍 읽었는데, 그 책을 다 읽기 전에 책방은 문을 닫아버렸다.
울진 읍내에는 내가 어릴 적 드나들었던 책방과 같은 작은 책방이 있다. 책방 벽은 화사한 페인트칠이 되어 있고, 커피 냄새가 은은하게 퍼진다. 그곳에 앉아 있으면 빼곡하게 꽂힌 책 제목을 목이 아프게 올려다보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아마도 책방에 스스럼없이 드나드는 아이들 때문인지 모른다. 학원 가방을 멘 초등학생이 혼자 들어와 여기저기 둘러본 뒤 휙 나가고, 야간 자율학습을 빠졌다는 고등학생은 소설책을 꺼내 한참 동안 들여다봤다. 책방 주인은 아이들과 친숙하게 눈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는다. 그는 아이들에게 책을 외상으로 내주기도 한다. 외상 장부가 있는 책방이라니….
사람들은 점점 책을 읽지 않고, 동네 책방은 거의 사라져 곧 유물로 남을지 모르는 세상에서 20년을 용케 버티고 있는 책방 주인은 느긋하기만 하다. 아마도 그에게 책은 파는 게 아니라 나누는 것인지 모른다. 그 책방에서는 수시로 작가 초청 강연과 토론회 자리가 열린다. 그는 책으로 사람과 사람을 잇고 있는 것이다.
“여기가 우리 읍내 사랑방이지요. 그래서 문을 닫을 수가 없어요.”
그는 책이 잘 팔리는 세상을 바라지 않는다. 한 달에 책 한 권 사는 일쯤은 아무런 부담이 되지 않는 세상, 퇴근하고 나면 책 읽을 여유가 있고, 사람들과 마주 앉아 책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마음 넉넉한 세상을 꿈꾼다.
하지만 봄이 온다고 해도 삶이 바뀌기는 쉽지 않을 터, 나는 그저 그 작은 책방이 오래오래 잘 버텨내길 바랄 뿐이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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