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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어뜨린다, 존치한다 말이 많던 세운상가는 여전히 건재했다. 겉으로는 그랬다. 세월에 깎이고, 파이고, 무너지는 것들을 쇠기둥으로 떠받치며 보수 중이었지만, 그래도 멀쩡해 보였다. 1층 가전제품을 꽉꽉 채워놓은 가게들도 문을 열었으며, 2, 3층에는 이런저런 전자기기를 파는 작은 가게가 빼곡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 가게들 틈바구니에서 몇십 년을 버틴 담뱃가게도 그대로다.

이곳은 그대로인데, 변한 건 세상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변하는 세상에 순응했다. 사람들은 전자제품 하나 살 요량으로 발품 팔면서 세운상가를 찾지 않는다. 카세트 레코더 하나 사겠다고 기차 타고 전철 타고 이곳에 와서 온종일 이 가게 저 가게 기웃거리다가 멀건 설렁탕으로 허기를 채우고는 해 질 녘에 기껏 비디오테이프 몇 개 사서 집으로 돌아가며, 다음에 또 오리라 다짐하던 이들은 이제 없다. 세계의 기운이 다 모일 거라는 세운상가의 명운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사람도 있다. 그는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세운상가에 들어왔다. 50여 년 전 일이다. 세운상가 한구석 손바닥만 한 가게에서 라디오를 조립해 팔던 소년은 흰머리의 노인이 되었다. 그는 서너 사람 들어서면 옴짝달싹하기 어려울 것 같은 작은 방에서 오래된 전축이나 라디오를 고친다. 무서운 속도로 달리는 세상과 뚝 떨어져 과거의 소리에 붙잡혀 있는 이들은 행여나 그가 세운상가를 떠날까 봐 두려워한다.

“이런 걸 고치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백 년도 넘은 전축을 들고 오는 사람도 있어요.” 돈 벌려고 하는 일이 아니다. 노래방 기계를 차에 싣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정말 돈을 벌 만큼 벌었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는 한 번도 돈 때문에 일을 하지 않았다. 복잡한 기계를 들여다보고, 만지는 게 좋아서 그는 세운상가를 떠나지 못한다.

퇴근만 하면 종로에 있는 음악 감상실로 달려가던 때가 가장 행복했다는 그는 요즘은 일 끝내고 친구들과 막걸리 마시는 재미로 산다. 주문한 진공관 라디오를 찾으러 갈 때는 설렁탕집에서 막걸리 한 잔 따라드릴 수 있으려나.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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