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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은 하루에 0.35㎜가 자란다. 1년 동안 자란 한 사람의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이어붙였을 때 총길이는 10㎞나 된다. 이렇게 끝없이 자라는 탓에 고대 사람들은 머리카락을 생명 순환의 상징이라고 봤다. 또 머리카락이 인간과 신을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여겨 아즈텍족의 제사장은 머리카락을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길게 늘어뜨렸다. 바빌론 시대엔 영웅의 조건이 건장한 신체, 긴 머리카락이었다. 바빌론의 영웅 길가메시가 병을 얻어 탈모가 생기자 장거리 여행을 떠나 머리카락이 다시 나길 기다렸다는 얘기도 있다. 황제를 가리키는 ‘카이저’, ‘차르’는 본래 머리카락의 숱이 아주 많거나 긴 머리카락을 뜻하는 낱말이었다.

이처럼 인류가 수천 년 동안 머리카락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보니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은 오랫동안 어떤 의식과도 같았을지 모른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10여 년 전에 서울 정독도서관 앞에는 50년이 넘은 이발소가 있었다. 벽에 매달린 삼색 기둥이 빙글빙글 돌아가던 이발소의 새시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한 풍경이 펼쳐졌다. 바닥에서 절대로 떨어질 것 같지 않은 육중한 이발 의자의 가죽은 반질반질 닳아 있었고, 세면대는 목욕탕처럼 작은 타일을 붙여 만든 것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나라 제2호 이발사 자격증을 갖고 있는 백발의 이발사가 흰 가운을 입고 가위질을 하는 모습은 그저 머리카락을 자르는 게 아니라 엄숙한 의식을 치르는 것 같았다. 그의 가위질은 신중하고 진지해서 정말 한 올 한 올 집어 잘라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손님에게 맞는 스타일을 잘 읽어내 머리를 깎은 사람마다 흡족해했다. 이제 그 오래된 이발소는 국립민속박물관 추억의 거리로 옮겨졌고, 이발사는 가위를 놓은 채 노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여의도에서 삭발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엉뚱하게도 늙은 이발사의 신념에 찬 가위질이 생각났다. 삭발은 가위질을 당하는 이의 신념을 드러낸 지 오래, 하지만 그것은 이 세상과 싸울 수 있는 수단이 몸뚱어리밖에 없는 약자들의 신념이며 항거다. 그런데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쥔 자들이 모여서 머리나 밀고 있으니 힘써 일하라고 준 세금이 아까워진다.

<김해원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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