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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을 긋다’를 국어사전에는 ‘한도나 한계선을 정해 놓다’라고 해석해 놓았지만, 내 경험으로는 이 해석에는 부사가 빠져 있다. ‘제멋대로’, 초등학교 2학년 때 내 짝은 책상에 제멋대로 금을 그어놓은 뒤 책 끄트머리가 금에 닿으면 팔꿈치로 옆구리를 찔렀고, 지우개는 금을 넘은 만큼 잘라 갈취했다. 진짜 화나는 건 그 아이의 만행을 네가 좋아서 그러는 거라고 한 담임 선생님의 어처구니없는 중재였다. 그 시절 사내아이들의 폭력을 애정이라 치부하는 바람에 초래한 ‘폭력의 정당화’에 대해선 길게 말하고 싶지도 않다. 아무튼 ‘금을 긋다’는 말엔 ‘나’와 ‘타자’를 명확히 구분하며 ‘나’의 잣대를 들이대는 자기중심적 사고가 숨겨져 있다. 

살면서 사람들은 숱하게 금을 그으며 살겠지만, 그렇다고 2학년짜리처럼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는다. 적어도 그것이 유치한 일이라는 정도는 아니까. 내가 사는 아파트는 옆 단지 주민들이 두 단지 사이를 가로지르는 화단을 자꾸 넘나든다면서 키 큰 나무를 심어 금을 그었다. 그리고 지난겨울에는 옆 단지가 화단 옆길에 일주일에 한 번 장터를 열도록 했는데, 거기서 나온 이익은 자기네가 챙기고 시끄럽고 냄새나는 것은 우리 몫이 되었다면서 화단에 아예 줄까지 쳐놓았다. 그리고 그 줄 위에는 “구경하지도 말고 사지도 말자” “○단지의 행복은 ○단지의 불행이다”라고 적은 현수막을 걸었다.

그 현수막이 걸린 쪽엔 늘 부부가 하는 국숫집이 자리를 잡는다. 국숫집은 이른 아침에 가장 먼저 들어와 비닐 천막으로 지붕을 세우고 벽을 친다. 날이 추워 뻣뻣해진 비닐 천막을 펼치는 데만도 한참 걸린다. 그렇게 가게가 만들어지면 부인은 불에 국수 육수를 올려 끓이고, 남편은 한쪽 구석에 국화빵 틀을 올려놓고 국화빵을 굽는다. 아직 일이 서툴러 보이는 남편은 국화빵을 굽는 내내 고개를 들지 않고 집중한다. 그가 고개를 들면 바로 눈앞에는 생떼를 부리는 현수막이 보인다. 제멋대로 금을 그어놓은 이웃, 이런 이웃이 있는 것은 정말 불행한 일이다.

<김해원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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