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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 “말이 말을 낳는다”는 속담이 있다. 교통수단과 정보매체가 제한되었던 때에도 어떤 특정한 정보나 뉴스가 빨리 전달되고 확산하는 모습을 잘 묘사했다. 특히 격변과 혼란의 시기에 백성들은 자신들의 꿈과 희망을 담은 메시지를 비밀리에 주고받았다. 집권자들은 이를 유언비어(流言蜚語)를 퍼트리는 행위라며 추적하고 탄압했지만 정상적인 언로(言路)가 막힌 상황에서 정보나 소문은 빠르게 여러 샛길을 만들며 제 갈 길을 찾기 마련이었다. 

다양한 정보매체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오늘날에도 이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과거처럼 언로가 막혀서 생긴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너무 많은 언로로 인한 혼란이 문제다.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서 누구나 자신의 정보나 의견을 전달할 수 있지만 집단이 만들어 내는 정보에 개인이 쉽게 휩쓸리는 위험도 그에 따라 커졌다. 디지털 문명의 비판자인 제란 러니어는 이런 현상을 중국 문화혁명기의 ‘홍위병’에 빗대 ‘디지털 모택동주의’라고 불렀다. ‘조국사태’를 둘러싼 소셜미디어 내 갑론을박의 모습도 이에 거의 가까운 수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과열된 분위기 속에서는 의도적으로 퍼트리는 가짜뉴스도 양산되기 마련이다. 유언비어와의 전쟁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정보화시대에는 더욱 어려운 싸움이 됐다. 이른바 ‘댓글부대’가 몰려다니며 근거 없는 거짓 소식을 퍼뜨리는 행위를 법적으로 규제해야 한다는 여론은 그래서 비등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뉴스가 거짓인지 아니면 과장된 표현의 결과인지를 법적으로 가르기도 힘들며, 표현의 자유가 침해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법적 처벌을 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가짜뉴스가 민주사회의 불가결한 요소인 의사 표현의 자유를 악용, 언론매체 일반에 대한 불신을 확산시켜 건전한 공론장의 성립을 위협한다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 문제는 또 기존의 정치, 법과 언론이 과연 그러한 가짜뉴스를 규제하거나 비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느냐는 물음과도 직결되어 있다. ‘정통한 소식통’에 의거한 북한과 관련된 많은 정보나 뉴스가 며칠 지나지 않아 가짜뉴스로 판명되어 북한에는 예수처럼 ‘부활’하는 사람이 왜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이럴 때 나오는 변명의 소리는 기껏해야 ‘오보’였다는 수준이다. 의도적으로 흘린 가짜뉴스는 아니었다는 주장이다. 선거 때가 되면 으레 기승을 부리는 온갖 가짜뉴스가 사회적 미디어에 넘쳐난다. 금년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중상과 모략, 또는 허위사실 유포로 인해 후에 당선이 무효가 되기도 하지만 과열된 선거 분위기는 진실과 주장 그리고 허위의 경계를 무너뜨리도록 만든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가장 많이 읽혔던 “프란치스코 교황, 도널드 트럼프의 지지를 선언하여 충격”이라는 제목으로 페이스북에 실린 가짜뉴스는 96만번의 공유, 반응 및 댓글이 실렸다. 게다가 당시 많이 읽혔던 10개의 뉴스 가운데 5개가 가짜뉴스로 판명되었다. 이런 정황을 고려, 2017년 10월에 발효된 독일의 ‘네트워크실시법’은 이의가 제기된 사회적 미디어의 내용을 운영자가 24시간 이내에 삭제하거나 차단토록 하고 최고 500만유로(약 64억원)의 벌금도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싱가포르는 작년 5월 최고 100만 싱가포르달러(약 8억6000만원)의 벌금과 10년의 징역에 처할 수 있는 ‘반가짜뉴스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 법이 도리어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도구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우려의 소리도 높다. 사회적 미디어의 운영자, 이용자 그리고 이의 운영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국가 사이에 균형 있는 상호견제가 필요함을 보여주는 내용들이다.

“진실은 너무 교활해서 붙잡기 힘들다”는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어떤 뉴스의 내용이 아예 날조인지, 가능성의 범주에 속하는지, 아니면 진실에 가까운지를 구별하는 문제는 오늘에 이르러 특별히 문제거리가 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엄청난 양의 정보와 이의 속도와 함께 움직이는 정보화시대에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과제는 쉽지 않다. 진리의 원칙을 확실성과 명증성에서 찾았고 단순히 가능하다고만 여겨지는 모든 것조차도 허위라고 주장했던 근대 합리주의의 원조 데카르트가 들으면 놀라 자빠질, ‘탈(脫)진실’의 시대라는 말까지 나돈다.

진실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뿌리를 내린 이런 상황이 바로 가짜뉴스의 양산과 유통도 가능한 세상으로 만들었다. 회의주의와 상대주의, 나아가 냉소주의까지 가세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가짜뉴스가 과연 법에 따라 규제될 수 있을지에 대해 낙관만 할 수 없게 되었다. 문제의 핵심은 사회적 신뢰의 결핍이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주위의 사건을 보다 단순화해서 보려는 욕구도 동시에 강해진다. 기존의 정치나 법, 또는 언론이나 전문가 집단이 이러한 욕구들을 제대로 충족시켜주고 신뢰를 쌓았다면 가짜뉴스가 들어설 공간도 그만큼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여전히 가짜뉴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정치와 언론매체, 가짜뉴스와 관련된 법적 책임 문제에 대해 계속 미적거리는 소셜미디어 기업도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해결의 열쇠는 결국 깨어 있는 시민이 쥐고 있다. 정보매체에 실렸다고 이 모든 것이 진실일 수는 없다는 확신이 이를 향한 첫걸음이다. 위에서 인용한 셰익스피어의 말도 실은 독일의 풍자작가이자 화가였던 빌헬름 부슈(1832~1908)가 남긴 말이었다. ‘가짜인용’도 이런 식으로 정보매체 안에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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