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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한참 고민했어. 88만원 세대는 옛말이고 이케아 세대부터 달관 세대까지 우리에게 많은 건 이름뿐이거든. 뭐라고 부르든 큰 상관은 없어. 110만원 받는 인턴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너나, 어차피 돈 조금 받고 고생하는 건 마찬가지라며 시민단체로 옮긴 내 친구나 처지는 비슷하니까.

서적 '88만원 세대' (출처 : 경향DB)


“사람은 모든 질문에 대답하지 않아도 된단다. 모든 것에 대답하려고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어떻게 되는데?” “잃어버린단다. 자기 자신을.” 마스다 미리의 만화책에 나오는 구절이야. 나는 그동안 내게 주어지는 모든 질문에 필사적으로 대답하거나 적어도 대답을 찾기 위해 애써왔어. 질문이란 건 관심이거나 진심, 최소한 걱정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질문의 대부분이 자신들의 관심을 충족하고 정해진 답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숨겨진 칼날일 수 있다는 것, 질문들 앞에 일일이 대답할 필요도, 설득할 필요도 없다는 걸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지. 예를 들면 이런 질문. “너희는 왜 우리처럼 닥치는 대로 일하지 않니?” “너희는 왜 우리처럼 부당함에 맞서 싸우지 않니?” “너희는 왜 우리처럼 자유롭지 못하고 눈치를 보니?” 내가 뭐라고 대답하든 그들의 생각은 이미 정해져 있어서 바뀌지 않아. 자신들은 “어떤 일이든 열심히 하고, 부당함에 맞서 싸우고, 자유로운 영혼이라 성공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니까.

그러니까 우리 세대에게 이 세상은 ‘아이를 사랑하지 않음으로써 아이를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나쁜 부모’ 같은 거야. 끝없이 노력해도 부모의 마음에 들 길은 요원한데도 아이는 자기를 덜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에 들려고 애쓴대. 자기를 마뜩지 않아 하는 부모의 마음에 드는 게 생존에 더 중요하기 때문이라나. 아무것도 주지 않을 ‘나쁜 부모를 사랑하는, 사랑받고 싶어 하는 자식’인 우리는 더 이상 기대조차 하지 않아. 20~34세 청년층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바라는 미래상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지속적인 경제성장’이라고 응답한 청년은 23%, ‘붕괴, 새로운 시작’이라는 응답이 무려 42%나 나왔다고 하잖아. 차라리 다같이 망하고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새로 시작하는 게 훨씬 나은 거야. 그치, 어차피 잃을 게 없으니까.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기억해? 지금도 그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투입되던 앳된 얼굴들을 잊을 수가 없어. 도쿄전력 직원은 당연히 아니겠지. 도쿄전력이 기계를 점검하라고 맡긴 업체의 부품을 공급하는 하청업체가 고용한 알바 아니었을까? 정부가 30년 설계수명이 다해 멈춰 있던 월성원전 재가동을 승인한 날, 난 고리원전 사고를 가상으로 다룬 소설을 떠올렸어. 사고 이후 해운대를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수입 식료품을 택배로 주문해서 식사를 해결하는데, 택배기사들은 동료가 급성백혈병 진단을 받고 죽어나가도, 보호장비 하나 없이 외국 생수와 시리얼을 배달하러 다니지. 일본의 사고는 실제 일어난 일이고 한국은 소설 속의 상황인데도 어쩌면 그렇게 젊은이들의 처지는 비슷한지. 복학을 앞두고 등록금을 버느라 대형 마트에서 야간작업하던 대학생이 가스에 질식해 숨진 사건도 있었잖아. 그 사고로 4명이 숨졌는데도 그 마트는 벌금 100만원을 냈을 뿐이야. 그게 지금 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야. 최저임금 올려달라고 징징대는 대신 능력을 키우고, 돈 없으면 비싼 햄버거 대신 ‘가성비 최고’인 밥버거나 편의점 도시락을 선택하라며 훈계하는 만화가 버젓이 신문에 실리는 세상. 이 세상에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지금처럼 으음 앞으로 뭐든 열심히 안 해야지. 아 잠만 열심히 자야지 열심히 안 해 아무것도. 지금까지 열심히 한 적도 없지만 앞으로도 안 한다. 안 해, 절대 안 해.”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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