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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읽고 싶지 않았다. 밀쳐냈고, 모른 척했다. 그래도 난 아마 읽게 될 것이다. 책 이야기다. 먼 곳으로 출장을 가기 전, <금요일엔 돌아오렴>(창비)에 삽화로 참여한 동료가 책을 건네주었다. 책을 손에 쥐었을 때, 딱딱하게 굳어진 내 감정들이 그 순간 파르르 살아나 책을 쥔 손끝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도저히 못 읽겠네. 울 것 같아요.” 내가 이렇게 말했다. “나도 힘들었어.” 그가 말했다. 감정이 화석이 된, 때론 그 단어만으로 혐오의 대상인 중년 남성들이 눈물이라니. 정신없이 떠돌다, 이제 더 이상 뿌리내릴 곳 없어 겨울가지처럼 말라가는 중년 남성들에게 눈물이 있을 리 있을까? 휴우, 깊은 한숨 내뱉고 감정과 ‘그 책’을 구석으로 밀어놓고 출장을 떠났다.

낮밤이 바뀐 그곳에서 일을 보고 지난 5일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탔다. 영화 두 편을 내리 보고, 아내가 권해준 황현산 선생의 <밤이 선생이다>라는 책을 꺼냈다. 몇 장 넘기다 2009년 말에 선생이 쓴, 당시 시점으로 거의 1년이 다 되어가는 용산참사에 대한 글을 읽었다. “이제 1년이 다 되어가니 혹시라도 잊은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는 첫 문장을 읽는 순간 손이 떨렸다. 애써 밀어놓은 그 책이, 아마도 그 책의 활자 하나하나에 꾹꾹 눌러담았을 고통이, 팽목항의 쓰린 바람처럼 불어닥쳤다.

지난 1월 서울시청 시민청에서 지난 2009년 벌어진 용산참사를 추모하는 전시회가 개막됐다. 사진, 판화, 설치미술, 영상등이 전시됐다. (출처 : 경향DB)


마침 비행기에서 틀어주는 최신 가요에서 알리의 ‘펑펑’이라는 노래가 나왔다. 가수도 꾹꾹 어떤 감정을 눌러담듯 노래를 불렀다. “잘 지내란 말은 마요. 슬퍼지려 할 때면 따뜻했던 목소리 자꾸 내 귓가에 맴돌아서. 오늘도 널 잊어버리려 애써도 안간힘을 써봐도 잊혀지지가 않아. 펑펑 울고 싶은 날엔 널 보고 싶은 날엔 그리움이 울컥 차올라 미쳤나봐. 엉엉 울고 싶은 날엔 널 안고 싶은 날엔 사랑하나봐 난 아직도.”

펑펑 그리고 엉엉. 타인의 슬픔과 상처는 그의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슬픔과 상처를 안고 괴로워하고 울고 싶은 이들에게 그만두라 말하는 이들도 있다. 어떤 이는 그 자리에 가서 펼침막을 펼치기도 한다. 그런데, 딱 한번만 생각해보자. 누구의 잘못 그런 거 말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그래서 거기에서 넘실거리는 수많은 사연들을 생각해보자. 그런데 그 슬픔마저 제대로 추모하지 못하는 그들을 떠올려보자. 이제는 귀찮으니 다 잊자고 하지 말고. 그게 진정 잊을 수 있는 일인가를 한번만 생각해보자. 그리고 슬프다면, 그 슬픔에 공감하고, 감정의 한 조각이라도 그 슬픔에 반응한다면 그냥, 펑펑, 엉엉 그렇게 울자.

그들 옆에 다른 목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순수하지 못하다고, 그래서 자꾸 뭔가를 더 달라고만 한다고, 언제까지 그럴 거냐고, 경제가 어려우니까 이제 그만두자고 생각한다 해도, 딱 한번만 순수하게 슬픔에 반응해보자. 그들은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고, 1년 동안 안간힘을 다해 잊으려 했던 사람들이니까. 혹 당신이 함께 울기 싫다면 우는 이들을 울도록 내버려두자. 슬픔의 울음조차 허락해주지 않는 세상이라면, 생각하기도 싫은 지옥일 터이니 그렇다.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니며 불구덩이에 고통받는 지옥의 모습만 떠올렸다. 하지만 적당히 나이를 먹고 보니, 울음을 참는 이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여기가 지옥이다. 차라리 지옥불에서 함께 위로해준다면 거기는 어쩌면 천국이겠다. 이제 펑펑 울 마음으로 그 책을 읽어볼 생각이다. 그리고 펑펑, 엉엉 울 것이다. 아, 비행기에서 읽었던 황현산 선생이 2009년에 쓴 글의 제목은 ‘그 세상의 이름은 무엇일까’이다. 선생의 글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한다.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사람이 불타면, 사람이 어이없이 죽으면, 사람들은 자기가 그 사람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만 여길 것이다. 그러고는 내일이라도 자신이 그 사람이 될까봐 저마다 몸서리치며 잠자리에 누울 것이다. 그것을 정의라고, 평화라고 부르는 세상이 올 것이다.” 맞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증오와 조롱이 넘치는 이 세상은 지옥이다. 더 악독하게만 변해간다.


박인하 |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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