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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면에 정희진씨가 생뚱한 글을 올렸다. 해당 칼럼의 온라인 제목은 ‘진중권 글에 분노한 이유’라고 되어 있으나, 아무리 읽어도 그가 분노하는 ‘이유’를 끝내 알 수가 없었다. 왜 화가 났을까? 내 글이 “권력층에 가까운 서울지역 대학 출신 일부 86세대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일반화했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나는 그런 적이 없다.

평균적 문해력을 가졌다면 내 글이 86세대 중에서 ‘민주화’를 팔아 권력이 된 집단을 겨냥한 것임을 알 게다. 얼마 전 시사저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도 있다. “옛 친구들 페이스북을 찾아갔어요. 그렇게 막사는 애들도 있지만, 다들 잘 살더라고요. 제 생활하면서 사회적 소수자를 위해 작은 실천들 하면서.”

‘민주화세대’라는 표현이 거슬렸단다. “민주화세대라는 통칭은 민주화세대에 의한 민주화세대의 차별, 즉 성차별, 지역차별, 계급차별을 은폐한다.” 내가 말한 ‘민주화세대’는 정치권의 민주화세대, 즉 그렇게 은밀히 “성차별, 지역차별, 계급차별”을 하고도 ‘민주화’라는 상징자본을 팔아 권력이 된 이들이다.

좀 더 넓히면 조국·윤미향·박원순 사태 때 권력 언저리에서 그들의 행태를 변명하고 옹호해줬던 86세대를 가리킨다. 유력자의 딸에게 기회를 박탈당한 학생, 운동가에게 이용당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인권시장에게 성추행당한 여성비서의 고통보다 그로 인해 구겨진 가해자의 체면을 더 걱정해주던 이들 말이다.

며칠 전 정희진씨는 한겨레신문에 이 세 사건에 대해 이렇게 썼다. “세 가지 사건은 배경도 다르고, 팩트 여부도 규명되지 않았다. 아니, 규명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가해자가 아니라는 얘기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가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의미다.” 한마디로 그냥 덮어두자는 얘기다.

이게 그의 분노의 참된 원천이 아닐까? 그는 말한다. “진 전 교수가 말하는 86세대에 여성은 없다.” 무슨 얘기일까? 정의연의 윤미향 의원은 여성이 아닌가? 박원순 사건 때 피해자를 ‘피해호소인’이라 부른 남인순 의원은 여성이 아닌가? 그리고 저 세 사건을 UFO처럼 미확인의 영역으로 두자는 정희진씨는 여성 아닌가?

정치권 86에게 보상을 바라지 말랐더니 이렇게 대꾸한다. “수배 중 의문사, 군대 가서 의문사, 녹화(綠化) 사업, 방황과 자살, 행방불명자, 고문 피해, 시위 중 상해가 이후 인생에서 넘치는 보상으로 연결된 경우?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이들이 언제 보상을 요구했던가? 보상의 요구조차 못하는 게 죽음의 정의(定意) 아닌가.

정치권의 ‘민주화세대’는 이미 “인생에서 넘치는 보상”을 받았다. 그것은 그들이 지금 누리는 지위와 권력으로 증명된다. 유공자로 인정을 받고 보상금도 챙겼다. 민주화를 위해 제 목숨을 바친 이들도 보상을 못 받았는데, 살아남아 온갖 부귀와 영광을 누리는 자들이 무슨 염치로, 무슨 보상을 더 요구하는가?

내가 아는 어느 86은 나라에서 보상해준다고 했을 때 아예 신청도 안 했다. 그는 “보상받으려고 한 일이 아니었다”고 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86세대의 명예 코드다. 내가 페이스북으로 둘러본 친구들 다수는 아직 그 명예를 간직하고 사는 듯했다. 그런데 그들은 조국·정의연·박원순 사태에 모두 분노하고 있었다.

그는 이 세 사건 때 “나 역시 할 말이 많았지만 ‘표현의 자유’도 용기도 없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때 표현의 자유는 차고 넘쳤다. 온갖 망언의 성찬이 벌어지고, 심지어 성추행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까지 벌어졌다. 그에게 부족했던 것은 한 줌의 ‘용기’였다. 대체 무슨 발언에 쓸 용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글이 횡설수설하는 것은 존재가 모순에 처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내 글이 그 부분을 건드렸나 보다. 그의 분노는 자신을 향해야 했다. 그 거룩한 분노를 내게 투사할 일은 아니었다. 그의 글은 나보다 그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86세대’라는 말로써 그를 호명한 건 아니었는데, 그 자신이 호명당했다고 느낀 모양이다.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투케’(조우)라고 할까? 내 글을 읽는 것이 그에게 해방서사의 상징계에 가려져 있던 실재계와 조우하는 외상적 체험을 제공했다면, 내 글쓰기는 제 할 일을 한 셈이다. 무의식은 깊은 데에 감추어져 있는 게 아니다. 그가 쓴 글의 표층에 드러나 있다. 그걸 그만 의식하지 못할 뿐이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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