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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진영논리다. 편 가르기를 넘어서 극도의 적개심을 보인다. 공동체 전체의 이익이 아니라 자기 진영의 유불리에만 신경을 쓴다. 모두의 안전이 걸린 코로나19 대책과 관련해서도 상대편의 책임을 부각시키고 윽박지르는 데 여념이 없다. 남 탓하기, 온라인에서 집단으로 몰려가서 인신공격 퍼붓기가 만연해 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제19대 대통령 선거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2017년 4월3일 저녁. 이제 막 민주당의 대선후보로 선출된 문재인 후보는 경선 과정에서 지지자들이 상대 후보 측에 18원의 후원금과 함께 문자폭탄을 보내고 비방하는 댓글을 조직적으로 올린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는, “(그런 일들은) 경쟁을 더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양념 같은 것”이라고 답했다.

당연히 파문이 일어났다. 다른 후보를 지지했던 박영선 의원, 국민의당 대표인 박지원 의원 등이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문 후보 측에서는 “갑자기 현장에서 질문을 받아 답했던 상황”이라며 “문자폭탄 등을 가볍게 생각한다는 뜻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다음날 국회에서 민주당 의원총회가 열렸다. 많은 사람이 문 후보의 발언을 기다렸다. 충분한 시간을 갖고 준비를 한 만큼 전날 답변에 대한 사과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더 나아가 특정 후보나 정파에 대한 지지를 넘어 인신공격성 댓글을 다는 사람들에게 자제를 당부하는 얘기를 바라기도 했다. 이미 경선에서 이겼고 대선 승리도 유력한 상황이었기에 포용의 제스처를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문 후보는 이렇게 말했다. “제 지지자 가운데 저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문자폭탄을 보내 의원님들이 상처를 입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알았든 몰랐든, 제 책임이든 아니든, 이 자리를 빌려 깊은 유감을 표하고 위로를 드립니다.”

표면적으로는 유감 표명이었다. 위로의 말도 있었다. 그러나 여기엔 극렬 지지자들이 잘못 받아들일 수 있는 메시지가 숨어 있다. 문 후보는 문자폭탄을 보낸 사람들에게 비판이나 자제 호소를 하지 않았다. 의원들이 상처를 입었다고 들었다는 말은 남의 일 얘기하듯이 들린다. 그런 일을 알았는지, 스스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여부를 밝히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선을 그었다.

악성 댓글을 다는 사람들은 그런 행위가 지지하는 정치인에게 도움이 된다고 여긴다. 단순히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해야 하는 일’이라는 의무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로 인한 책임을 감당할 의사도 있다. 다만 혹시라도 그 정치인에게 피해가 가거나 부담이 될까봐 두려워한다. 그런 상황에서 당사자가 자제를 권유하지 않을뿐더러 자신에게 책임을 물을 일이 아니라고 말하면 일부 지지자들은 더 해도 좋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진영논리는 이 발언 이전부터 있었고 문자폭탄을 보내는 행태의 책임을 문재인 당시 후보에게 묻는 것은 부당하다. 그러나 나는 이때가 정말 아쉬운 ‘놓쳐버린 기회’라고 생각한다. 리더의 발언이 갖는 영향력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저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악성 댓글을 달고 문자폭탄을 보내는 일은 결국 다 제 책임이 됩니다. 멈춰주실 것을 강력히 호소합니다”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은 이론상 유권자들과 동등한 대표에 불과하지만, 실제론 더 큰 책임이 있다.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지도자가 방향을 제시해주길 바란다. 어떤 일에 힘써야 하는지, 어떤 일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 말해주길 기대한다. 그런 면에서 대한민국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인 진영논리에 대해 대통령의 분명한 발언이 없는 것은 실로 아쉽다.

리더는, 메시지가 없다는 것 자체가 메시지다. 청와대 민정수석이 페이스북에 ‘죽창가’를 올리고 국민 일부를 ‘친일파’로 몰아붙일 때, 장관들이 집권 3년이 넘도록 무슨 문제만 터지면 반사적으로 지난 정부나 보수언론 탓을 할 때, 여당 정치인들이 불리한 판결이 나오면 서슴없이 사법부에 대한 공격에 나설 때 대통령이 제대로 꾸짖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이런 모습이 일부 극렬 지지자나 반대편에 선 사람들에게 어떤 오해를 불러일으키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이견이 있을 수 있고 주장이 다를 수 있다. 격론을 벌이다보면 감정이 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가 건전하게 유지되려면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선의도 인정하고, 우리 모두가 운명공동체라는 인식도 필요하다. 가장 어렵고 중요한 문제 해결에 리더가 나서야 한다. 코로나19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은 상황에서도 서로를 적으로만 대하는 지금, 우리의 지도자 대통령에게 진영논리를 타파하자는 절실한 메시지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한 일일까.

<금태섭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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