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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속 학자는 제 눈으로 본 것만 관찰하고 요령 있게 말한다. 대중 작가들은 제가 본 것들을 남의 눈으로 말한다. ‘낯설게 말하기’이다. 배우들은 현실생활은 잘 모르면서 흉내 내기에는 익숙하다. 마치 남의 인생을 그럴듯하게 잘 보여주는 것처럼.

나쁜 정치인은 남의 일을 자기 일처럼 실천한다고 공언한다. 그 가운데 가장 거짓말 잘하는 정치꾼은 끝내 거짓말이 되고야 말았던 수많은 약속을 마구 해대면서 종종 대권을 쥐어 왔다. 그리고 저질 언론인은 남의 이야기를 듣고 아무 생각 없이 베껴 쓰기를 즐긴다. 이를테면 못난 기자는 정부 대변인의 말을 받아쓰는 데 능숙할 뿐이다. 언론고시라는 걸 엄청나게 준비하고 시험을 보았으면서도 현직에서 기껏 배운 것은 외우고 입력하는 것뿐이었다. 그런 용도 폐기되어야 할 사람들이 엄청 욕을 얻어먹으면서도 살아남는 비결은 상황조립이다. 그래서 ‘조립사회’의 TV 시청자들은 무엇이 진실인지를 확인하려 하지도 않고,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꾼은 마치 자기가 조물주인 양 사회를 조립하고 해체하려 든다.

이런 조립사회에서 지식인은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하는 데 많은 공력을 들여야 한다. 조립사회란 사회 구성과정에서 꼭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들을 누구도 구분하지 않고, 그것들이 뒤엉켜 있는 혼재된 체제를 뜻한다. 말하자면 조립사회는 그 사회의 어느 한 부분만 튼튼하다면 다른 어느 한 부분이 부실하더라도 그런대로 유지되는 세상인 것처럼 보인다. 튼튼한 그 한 부분을 옮겨다 놓으면 매우 그럴듯한 사회구성이 가능한 체제를 이른다.

따라서 이 사회는 본질적으로 불안정하고, 지속 불가능한 체제이다. 왜냐하면 그 사회는 마치 상환능력도 없는 채무자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위와 아래, 좌와 우를 왔다갔다 오가면서 빚 독촉을 막아낸다고 한들 신용불량이라는 빨간불을 피할 수 없는 것과 같은 불안한 체제이기 때문이다.

조립사회의 한 단면 (출처 : 경향DB)


추석 연휴 직후에 한 대통령의 한마디가 조립사회의 붕괴를 자초하는 위험한 담론이다. ‘경제활성화’와 ‘국민행복’. 이 얼마나 환상적 표현인가? 양립할 수 없는 대립적 목표를 설정하고 나만을 따르라는 발언 방식은 조립사회의 절대 권력자가 재가한 통치 언어의 압권이다. 왜냐하면 그런 권력이 출몰해 대권을 쥘 수 있었던 배경이야말로 조립사회의 한 단면이기 때문이다. 유권자의 일부를 절대 지지층으로 두고 있는 한, 어떤 실언과 망언과 폭언에도 불구하고 근접한 이로부터의 칭찬과 격려와 아부가 답지하고 있는 현상이야말로 조립된 권력의 실체 그 자체였던 것이다.

조립사회의 전형은 이런 지옥과 같은 사회의 축도를 이룬다. 매사가 평범하고 안정돼 보이지만 안으로는 썩어있고, 뒤져 볼수록 불안정한 체제이다. 기성 악덕 종교와 지적 사기와 정치적 기만이 제 세상인 양 판을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조립사회가 물컹물컹 휘적거리다가 무너지는 취객의 세상은 아니다. 그러하기에 이런 사회에서 생존하려면 약간의 기능과 역할에 기대어 제 할 일만 딱딱 하다가 퇴근시간에 맞춰 나가는 신입사원처럼 처신해서는 곤란하다. 이런 저열함 속에서도 죽지 않으려면 주류권력에 기대어 남의 불행을 그들의 것이라고 치부하고, 나의 기쁨만이 세상의 전부라고 맹신하는 이기주의의 화신이 돼야만 할 것이다.

이런 허망한 사회의 현실을 직시하고 초월하려는 꿈을 꾸는 이에게만 지혜와 용기와 희망의 샘이 끝내 솟아나올 것이다. 엉터리 사회의 물량공세에 찌들지 않고 자신의 꿈과 미래를 보고 앞으로 나아가는 이에게만 큰길이 열리는 법이다. 부덕한 사회 극복의 올바른 해답은 조립사회를 연장하려는 성장 음모의 물량공세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로의 변형을 위해 진화의 방향을 올바르게 잡는 일이다.


허상수 | 지속가능한사회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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