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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학살(1947~1954)을 인권과 배상적 정의, 화해의 관점에서 정면 고찰하는 국제회의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한국학연구소 등의 주최로 지난 29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다. 흔히 ‘제주4·3’으로 불리는 이 비극에 관한 학술 논의는 그간 주로 국내 학자들끼리 모여 진행되어 왔다. 국제회의가 열리는 경우에도 한국과 일본, 그리고 드물게 그외 타국 학자들이 참여하는 정도였다. 이번엔 한·미·일 연구자뿐만 아니라 프랑스 파리에서도 국제정치학자가 참여하는 등 나름대로 격식을 갖춘 규모로 개최되었다.

이번 국제학술회의의 핵심주제는 제주학살 피해에 대한 인권과 배상적 정의 확립이었다. 지난 1월17일 한국 사법사상 최초로 4·3 군사재판 생존 수형인들에 대한 공소기각(사실상 무죄) 판결에 대해 국제인권법 및 배상법 학자 등이 이를 집중 고찰한다는 데 중대한 의미가 있다. 국내 법학계가 공개적 논의를 하고 있지 않은 사이에 이들은 이미 지난해 10월8일, 중앙대학교에서 국제포럼을 개최한 데 이어 이번 한·미·일·불 국제회의를 통해 이 재심 판결의 내용과 의미, 역사적 의의에 대해 고찰하였다. 

이들 4개국 학자들이 한국법원이 내린 4·3 군사재판 생존 수형인 재심 판결에 주목하는 이유는 첫째, 2003년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채택과 대통령 사과 이후 답보 또는 퇴행 위기에 시달린 한국의 과거청산 수준을 넘어서 이행기 정의 확립의 기회라고 보기 때문이다. 즉, 이 재심 판결은 제주학살 피해회복을 위한 결정적 계기 또는 모멘텀을 제공할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둘째, 1948년 12월과 1949년 6월과 7월, 제주학살 당시 2차례 열렸다는 이른바 4·3 군사재판의 절차적 정당성의 부실이 확인됨으로써 제주4·3사건특별법 개정 논의에 탄력을 제공했다고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촛불시민혁명에 기초하여 성립한 문재인 정부의 이행기 정의 확립 약속에도 지지부진했던 피해회복 조치를 위한 국회에서의 논의에 불씨를 제공해 주었다고 보는 것이다. 

셋째,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들 인권법 학자들이 제주4·3 군사재판 재심을 1940년대 일본계 미국인들의 강제연행과 수용에 대한 인권재판 제기와 승소, 미합중국 연방정부 차원의 사과와 피해배상금 지급 사례와 비교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는 데 있다. 제주4·3의 미국 책임문제 해결과정에서 이미 2013년 미 하와이대 법학전문대학원 연구팀이 제안했던 ‘정의를 통한 사회적 치유’의 길이 미국에서 열릴 것이라는 학문적 희망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펜실베이니아대 4·3 국제회의에서 주목할 점은 제주학살을 처음 세상에 알린 현기영 작가의 중편소설 <순이삼촌>의 무대인 제주 북촌리 학살 체험자가 직접 미국인 청중 앞에서 공개 증언했다는 점이다. 이 학살 체험자는 당시 자신이 살던 동네 마을에 출몰했던 미군의 실존 상황을 처음으로 생생하게 증언하였다. 

미군정 3년 평화시대부터 일어났던 제주학살의 진실규명과 문책작업은 이제 국내 차원을 넘어 미국 땅에까지 이르고 있다. 민족분단을 거부했던 이들에게 가해졌던 잔혹하고 처참한 학살피해와 누가 이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진실규명의 빛이 어둠 속에서 피해자의 인권과 정의 확립을 위해 끝까지 나아가고 있는 셈이다. 진실은 쉬지 않는다.

<허상수 | 한국사회과학연구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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