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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방역이 글로벌 표준으로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메르스 사태 때 시행착오에 따른 경험의 축적과 새로운 정치 리더십이 우리 방역체계의 글로벌화를 현실화시킨 것이다. 이참에 K경제, K평화 등 K시리즈를 연속으로 만들자는 논리도 설익은 얘기로만 들리지 않는다. 문제는 K평화론에 이르면 남북문제라는 난제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국가 간 협력은 기능적이고 기술적인 하위정치(low politics) 부문에서의 협력이 차고 넘치는 과정에서 새로운 연대와 협력체가 만들어진다는 ‘자동화 과정’ 발상에 기대어 왔다. 유럽 통합의 사례는 감히 흠집조차 낼 수 없는 완벽한 전형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남북협력 사업은 상위정치(high politics)와 하위정치를 동시에 가동하거나, 오히려 상위정치로부터 시작해야 시동이 걸리는 단계로 들어서 있다는 데 특징이 있다. 대북 제재가 북한의 정권과 주민을 구분하지 않고 북한 정권의 핵 개발 의지를 좌절시키는 데로 나아간 2016년 이래, 남북협력의 모든 영역은 정치적 결단을 요구하는 상위정치의 주제가 되었다. 워킹그룹이라는 이름으로 나사 하나 이전하는 것조차 동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대북 제재 체제하에서 순수한 인도적 지원이라는 하위정치 이슈는 존속되기 어렵다. K평화의 주축이 되는 모든 내용은 한·미동맹이라는 변수를 거쳐야 하는 상위정치 프로세스가 된 것이다. 이것이 K평화가 직면한 남북문제의 특징이다.
따라서 ‘K평화’의 요체는 상위정치에서 시작하는 남북협력이라는 새로운 방식을 개척하는 데에 있다. 9·19 남북군사합의서는 탄생부터 전형적인 상위정치 이슈이다. 따라서 K평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어렵게 만들어진 9·19 남북군사합의서를 지키고 가꾸어야 한다. 북한발 위기에 맞대응해 악순환의 굴레에 빠져들기보다는 선제적 신뢰 구축 조치를 통해 평화의 순환 고리를 지켜가는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
다음은 고도의 정치적 현안이 되고 있는 비전통적 안보 위협에 대비한 남북협력 사업을 개척하는 것이다. 이미 문재인 대통령은 비전통 안보와 인간 안보를 중심에 둔 남북협력을 제안했다. 보건뿐 아니라 재난, 환경, 사이버 등 새롭게 부상하는 비전통적 안보 위협은 이미 상위정치의 현안이 되고 있다. 마스크와 방역복의 확보를 둘러싼 현대판 ‘해적질’이라는 해프닝이야말로 웃지 못할 사례다.
세 번째로는 표준화를 목표로 한 보건협력을 더욱 구체화하는 것이다. 때마침 북한이 평양종합병원 건설에 매진하고 있다. 평양종합병원 관련 남북협력은 방역 ‘지원’ 사업이 아니다. 한국이 K방역으로 이루어낸 글로벌 표준의 성과를 북한과 공유하는 사업이다. 북한의 보건의료 시스템이 타국의 표준을 따를수록 통일비용이 늘어난다는 전략적 고려는 고도의 정치적 판단하에서만 인용될 수 있다. “정보 공유, 표준적 체계 구성, 방역 관련 기술 협력”을 강조한 통일부 장관의 주장은 시의적절하다.
남북협력은 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전략적이면서 동시에 상위정치에 어울리는 실행력을 갖춰야 한다. “방역협력은 조용히, 평화는 요란하게”라는 K의 조합이 이 어려운 시기에 또 하나의 신화를 만들기를 희망해본다.
<이정철 |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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