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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라는 말이 강박이 된 지 오래다. “행복하세요!”라는 말이 마치 힘든 일상을 감추기 위한 주술처럼 느껴진다.

학교도 예외는 아니다. ‘폭력 없는 행복한 학교’라는 현수막이 부적처럼 나부끼는 것을 볼 때면, 답답함이 가슴을 짓누른다. 폭력의 실체는 외면한 채 행복한 학교를 외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말이다.

아이들끼리 일어나는 싸움은 폭력의 한 측면일 뿐, 본질적 문제는 아니다.

한국방정환재단이 조사한 ‘국제 비교로 본 한국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에 따르면 최근 6년 동안 한국 학생들의 주관적 행복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꼴찌 수준이다. 자살 충동을 느꼈다는 어린이·청소년은 22.8%로 최고치에 가깝다. 그런데도 별로 놀랍지 않다는 게 더 놀라울 따름이다.

한편 지난 2월 <추적 60분>에서는 자해에 빠져 있는 청소년의 실상이 낱낱이 보도된 바 있다. 중학교 1학년 아이들 10명 중 1명이 자해 경험이 있다고 한다.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자기 몸에 고통을 가함으로써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아이들. 취재진은 “공부를 하지 않으면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주변의 말과 시선”을 자해의 가장 큰 요인으로 꼽았다. 생명 존중 교육을 강화하고, 학교에 전문 상담사를 파견하는 일이 필요하겠지만, 이 역시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다. 우리 교육의 병폐를 뿌리 뽑지 않는 한, 아이들의 자해는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학교는 약육강식과 승자독식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석차와 등급이 민주주의의 고귀한 가치를 압도한 지 오래다. 자유와 평등, 평화와 연대는 대학 입시라는 욕망 앞에서 그저 허울뿐인 담론으로 치부될 뿐이다. 교육의 공공성을 강조했던 정권도 이 거대한 욕망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새로운 틀 위에서 교육 생태계를 설계하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다.

지금으로써는 국가교육위원회가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보인다. 국가교육위원회의 핵심은 ‘초정권적, 초정파적 사회적 합의기구’라는 것과 10년 단위의 중장기 국가교육 비전을 수립한다는 것이다. 대통령 임기에 맞추어진 짧은 주기로는 국가교육 철학을 담아내기가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대통령 임기 내에 성과를 내야 하고, 유권자의 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정치의 생리로는 교육의 백년지대계는 난망할 수밖에 없다. 정권과 정파를 넘어서는 사회적 합의기구가 절실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하지만 국가교육위원회의 출범을 두고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은 듯하다. 국가교육위원회의 독립성 보장 문제, 교육부의 옥상옥(屋上屋)이 될 것이라는 우려 등은 국가교육회의 측에서도 되새겨야 할 문제일 것이다.

다만 국가교육위원회의 출범을 정치적인 유불리(有不利)로 접근하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절할 필요가 있겠다. 지금 상정해야 할 궁극적인 의제는 진정한 배움과 아이들의 삶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을 해(害)하고 있는 아이들의 절규 앞에서 정치적 이해관계를 따지는 추태는 보이지 말아야 할 것이다. 폭력의 가해자라는 측면에서 어른들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권력, 혹은 교육에 가까이 있는 어른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국가교육위원회의 출범이 진정한 배움으로 나아가는 마중물이 될 수 있길 바란다. 부족한 부분은 치열한 토론을 통해 보완해 나가면 될 일이다. 교육이 인간의 소외를 부추기는 일은 이제 그만 멈춰야 한다. 정치와 교육계의 대승적인 결단이 있길 바란다.

<이충일 | 오산 다온초 교사·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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