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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무형문화재와 인간문화재를 혼동하고 있다. ‘가야금 산조 및 병창’이 무형문화재라면 이 무형문화재를 보유한 사람은 인간문화재다. 요즘은 ‘무형문화재 보유자’라고 부른다.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17년간 살아오면서 갖게 된 가장 큰 걱정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나는 전통 깊은 국악가문에서 태어나 별 어려움 없이 국악인의 길을 걸어왔지만, 주변에서 만나는 수많은 보유자들을 보면서 동병상련의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괄시도 있지만, 가장 큰 두려움은 잊히는 것에 대한 위기와 공포감이다.

평생을 바쳐온 기량과 재주가 자신이 죽으면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고 생각해 보라. 그것은 자신의 몸이 사라지는 것과는 또 다른 측면의 비애요, 뼈를 깎는 아픔이다. 또한 이것은 보유자 개인의 상실과 슬픔을 넘어 국가적 차원의 손실이다. 대대로 전승되어온 유·무형의 유산들이 모여 결국 국가를 대표하고 민족을 대변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런 유산들이 점점 사라진다면 훗날 대한민국의 전통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수많은 해외공연을 다니면서 각국의 전통문화를 접할 기회를 가졌다. 전통은 누가 더 잘났고 못났다고 등수를 매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온 힘을 다해 지켜온 것 자체가 자랑스러운 것이다. 어느 나라를 가든 그 나라가 부유해서 부럽기보다는, 자신의 문화를 올곧게 지켜온 나라라서 부러웠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동안 전통에 대한 홀대와 열등감이 있었고, 전통문화유산의 가치를 제대로 조명하지도 않았다. 최근 들어서야 한류 열풍이 불고 세계 각국이 한국의 전통에 주목하면서 우리의 어깨가 으쓱해졌지만, 이것도 유행이 물러가면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생긴다.

그러던 차에 전주 한옥마을 근처에 10월1일 ‘국립무형유산원’이 문을 열게 되어 반가운 마음이 크다. 무형문화재 보유자라는 이유로 내가 어울리지도 않게 개원행사 총감독을 맡았다. 행사 연출에 대해선 문외한이지만, 국립무형유산원이 개원한다는 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10월1일 개원하는 국립무형유산원 전경. (출처 : 경향DB)


국립무형유산원은 나와 같은 무형문화재 보유자들에게는 천금보다 소중한 공간이다. 전승자와 이수자들을 지원해 주고, 발표할 공간을 제공하고, 국민들과 접할 기회를 마련해 준다. 이것이 바로 ‘보존, 지원, 전승, 교류, 체험’을 내세우는 국립무형유산원의 설립 이유다. 그동안 수많은 무대에 오르면서 어떻게 하면 소중한 유산을 오래도록 후대에게 전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큰 고민이었다. 해법은 하나다. 국민들의 사랑을 받으면 된다. 사랑받는 유산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국민들과 접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없고, 자신의 기량을 보존할 경제적 여력이 없다면 유산은 사라질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다.

이제라도 국립무형유산원이 설립돼 국민들 속으로 다가갈 마당을 깔아주고, 체계적으로 보존·활용한다고 하니 어찌 고맙고 반갑지 않겠는가. 섬진강 시인으로 유명한 김용택 시인이 내게 축시를 보내왔다. ‘천지간에 처음인 것처럼/ 고운 것들과 미운 것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무형이 유형이 되어 세상을 파헤쳐 뒤집고/ 전주시 서학동 새 흙 위에/ 우뚝 서서 천지를 울릴 것이니…’. 이 기쁜 날, 어찌 소리 한 자락이 빠지겠는가. 오롯이 무형유산만을 위해 거대한 복합문화공간을 만든 것은 국립무형유산원이 세계 최초요, 유일하다고 한다. 모든 무형문화재 보유자를 대표하여 10월1일 여는 무대에서 축창(祝唱)을 올릴 것이니, 우리 전통문화를 사랑하는 국민들이 많은 발걸음 해주시길 바란다.


안숙선 | 국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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