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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훈 | 전남과학대 교수·일문학


 

“약속한 여학교에 진학시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미쓰비시 중공업 나고야 항공기제작소 도토쿠(道德) 공장의 열악한 노동조건과 생활환경하에서 어린 소녀들에게 참으로 가혹한 노동을 강요했으며 임금도 주지 않았습니다. 또한 고국에 거주했다면 결코 경험하지 않았을 공습과 대지진의 공포와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중략) 일본국, 혹은 미쓰비시 중공업은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 위에 성립한 일본 헌법정신을 위반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당신들에게 전쟁 책임을 수행하지 않은 점에 대해 진정으로 사과드립니다.”


위 내용은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 근로정신대 소송 변호단’(일본 측)이 작성한 사죄문이다.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 그들의 사연을 파악한 양심적인 일본 변호단이 소장 서두에 미쓰비시 중공업 이름으로 우리 할머니 피해자들을 위해 작성한 내용이지만, 평범한 일본인이라면 최소한 이 정도로 마음을 담아 표현하는 게 당연하다.


일제강점기에 강제노역을 당한 피해자와 지원모임 회원들 (경향DB)


하지만 지금까지도 미쓰비시 측은 묵묵부답이다. 협상 결렬 후 미쓰비시 측에선 “한·일 양국이 체결한 청구권협정이 존재하고 우리나라(일본) 최고재판소에 의해 2008년 10월 당사에 법적 책임이 없다는 요지의 판결이 확정”된 점을 거론하고 있다.


과연 타당할까? 국내에선 작년 5월 최봉태 변호사 등에 의해 대법원 판결로 강제 징용자 청구권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하지만 미쓰비시 측은 이를 우리 측 입장만을 대변하는 것으로 여기고 일본 측 판결을 더 중요시할 터인데, 지난 2월19일의 ‘도쿄신문’ 기사는 그와 관련해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국내에도 보도됐지만, 일본 시민단체 ‘한일회담 문서·전면 공개를 요구하는 모임’에 의해 소송이 제기돼 ‘비공개는 위법이다’라는 판결이 작년 10월에 도쿄지법에서 내려진 것이다. 일본 외무성은 결국 ‘한일회담 문서·전면 공개를 요구하는 모임’에 한·일 국교정상화 교섭을 둘러싼 외교문서 중에서 종래 애써 감추었던 부분도 공개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3월16일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총회 참석차 광주를 방문한 이양수 ‘한일회담 문서·전면 공개를 요구하는 모임’ 사무차장의 증언은 생생했다. 외무성 공개를 이끌어내기까지의 일본 양심적 시민단체의 노고와 투쟁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이 같은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일본 측은 “우편저금, 유가증권, 미불금 등 식민지 지배하의 법률관계를 전제로 하는 지불만을 상정했고, 강제동원에 대한 사죄와 배상은 포함시키지 않은” 점이 분명히 밝혀졌으니 말이다. 청구권협정에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가 반영되지 않은 사실이 명확해진 만큼 일본 최고재판소의 판결도 오해에 의한 것으로 미쓰비시 측의 변명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는 내용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법과 제도를 강조하기에 앞서 서로에게 화해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소중한 가치가 인간의 보편적 윤리와 최소한의 양심에 근거함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미쓰비시 중공업 사장 앞으로 서간을 보내 피해자들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촉구했고, 재협상의 필요성을 역설했건만, 어찌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지 몽매하기 짝이 없다.


오는 5월24일이 광주법정에서의 변론기일이다. 전범기업 미쓰비시 측의 행태가 언론에 크게 보도돼 미쓰비시 상품 불매운동이나 한국 내 미쓰비시 상품 차압 등의 압력이 행사되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야말로 불행한 일임에 틀림없다. 재협상의 물꼬가 트이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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