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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훈 | 소설가



몇 년 전 가을이었다. 당시 나는 산 중턱의 조립식 주택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주인아저씨가 사람들과 함께 오더니 집 주변에 벚나무를 몇 그루 심었다. 내 키의 두 배 정도 되는 것들이었다. 한 달쯤 지났을까, 강력한 돌풍이 불었다. 바람이 초속 22m였으니 소형급 태풍이 멀지 않은 곳을 지나가는 정도 되었다. 밤 내내 지붕이 들썩이고 창문이 깨지려고 했다. 비도 많이 왔다. 하지만 섬에서 그 정도는 그러려니 한다.


아침에 보니 뜻밖에도 벚나무 중 하나가 옆으로 넘어져 있었다. 뿌리가 반 넘게 드러나 있고 삼각형으로 세워둔 지지목도 뽑혀 나뒹굴고 있었다. 날이 계속 좋지 않아서 주인아저씨는 찾아오지 않았다. 그는 마을 안에서 살고 있었다. 나 혼자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그 녀석은 누운 채 비참한 모습 그대로 있어야 했다.


며칠 지나 마을 갈 일이 있어 집을 나섰는데 그때 보았다. 쓰러진 벚나무 한 쪽 가지에서 하얀 벚꽃 네 송이가 피어있는 것을. 나무는 죽기 직전에 혼신의 힘을 들여 마지막 생식을 시도한다는 것을 읽고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꽃을 분명하게 본 것은 처음이었다.


죽어가면서 피어올린 네 송이 벚꽃. 차가운 가을바람이 그것을 위태롭게 흔들고 있었다. 생식이면서 유산이며 마지막 유언 같았다. 내가 그 옆에서 피운 담배가 다섯 개비도 넘었을 것이다. 그게 무어든 죽어가는 것은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리고 그 존재가 자신이 죽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는 데다 마지막으로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까지 알고 있어서 더욱 그랬다.


그 다음날 주인아저씨와 사람들이 왔고, 우리는 그 나무를 다시 세울 수 있었다. 지지목도 크고 튼튼한 것으로 교체되었다. 이제 녀석은 유언을 남긴 비장한 존재가 아닌, 멋모르고 꽃을 피운 철부지 몰골이 되어버렸다. 네 송이 꽃은 보름 넘게 그 자리에 매달려 있었다. 졸지에 가을 꽃나무가 되어버린 것이다.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나무에게 말을 걸었다. ‘너 참 민망하겠다?’


이사 나온 뒤로도 해마다 그 녀석을 보러 간다. 어제도 갔다. 희고 탐스러운 꽃이 잔뜩 매달려 있었다.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옆에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꽃송이를 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자신이 넘어졌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녀석을 만지며 모처럼 말을 걸었다. ‘이제는 적당히 해도 되겠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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