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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이게도 대통령기록의 중요성을 최순실 사태가 증명해주고 있다. 대통령기록은 대통령의 국정철학이자 방향이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국가 예산을 동원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어설픈 말솜씨에도 발언하는 순간 국가 예산이라는 노다지가 쏟아진다는 것을 최순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집요하리만큼 국가시스템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나라살림연구소가 발간한 ‘최순실과 예산도둑들’에는 놀라운 장면들이 나온다. 최순실이 써준 대통령 연설문을 박근혜 대통령이 대독하면, 관련 부처들은 연설문을 중심으로 예산을 편성했다. 특히 최순실이 좋아했던 평창 올림픽, 창조경제, 문화융성을 언급할 때마다 관련 부처는 바빠졌다. 그 결과 문화체육관광부는 87번, 미래창조과학부가 90번이나 대통령 관심 예산으로 언급되어 있었다. 이런 과정으로 반영된 최순실 예산은 지난 3년간 1조4000억원이다. 이것이 대통령 연설문의 힘이다.

이런 비밀을 간직하고 있던 박근혜 정부는 청와대 정보공개 요청을 유독 불편해했다.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가 청와대에 외교사절들이 선물한 대통령선물목록을 정보공개청구 하였으나, 누가 어떤 선물을 언제 줬는지 알 수 없도록 기존 정보를 재가공해 공개했다. 위 정보는 이명박 정부마저도 일목요연하게 공개한 자료다. 그 이유를 알고 보니 대통령 선물이 최순실 집에 전시되어 있었다. 대통령 선물이라는 공적자산도 개인적으로 챙기는 저 집요함과 꼼꼼함을 누가 상상했겠는가.

이렇듯 박근혜 정부에서 대통령기록, 공공기록, 정보공개정책은 끝도 모르게 무너졌다. 시민에게는 닫힌 정부, 최순실에게는 활짝 열린 정부였다. 그러면 위와 같은 사태들은 어떻게 개혁을 해야 할까? 벚꽃 대선을 치를 가능성이 높고, 차기정권은 인수위원회도 없이 임기를 시작해야 하기에 각 캠프는 지금부터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우선 대통령기록 생산에 대해 강력한 개혁조치가 필요하다. 대통령이 근무 중에 언급한 모든 발언내용은 녹음 및 속기록으로 남겨야 할 것이다. 이는 대면지시, 전화통화, e메일 등을 모두 다 포함해야 한다.

참여정부 이지원 시스템 복원, 미국의 e메일 공공기록 관리정책, 백악관 녹음 시스템 등을 참고해 차기 정부에 반영해야 한다. 최근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대통령 일정 24시간을 공개하겠다고 밝혀 이 문제에 대해 가장 먼저 언급을 했다. 매우 환영할 만한 정책이다.

다음으로 청와대 및 정부의 기록·정보공개정책을 전담하는 기구 신설이 시급하다. 정보는 매우 미묘해, 공개만 고집하다 보면 국가비밀, 개인정보 등이 노출되고 비공개 정책을 유지하면 각종 비리와 부패가 발생한다. 현재 국가차원에서 정보공개기준을 전문적으로 고민하는 기관이 없어, 부처별로 정보공개 편차가 심각하다. 이런 것들이 쌓여 정부 신뢰도를 떨어뜨린다.

다행히 서울시는 박원순 시장 부임 이후, 정보공개심의회를 체계적으로 운영해왔고 관련 예산을 투입해 각종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다음 정부는 서울시 정책을 반영해 국가기록정보위원회를 신설하고 정보·기록관리 체계를 정비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각종 기록관리 및 정보공개 법령 정비가 시급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정호성 비서관을 통해 국가기밀 및 대통령기록을 최순실에게 지속적으로 유출·은닉했다. 그런데 검찰은 대통령기록물법 및 공공기록물법 위반으로 위 두 사람을 기소하지 못했다. 법의 사각지대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향후 대통령기록물법, 공공기록물법, 정보공개법 등을 개편해 국가기록 및 정보를 특정인의 이익을 위해 유출할 때 처벌할 수 있는 법안 마련이 필요하다.

대통령기록 및 국가정보는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공적재산이다. 하지만 권력을 잡은 세력은 공적재산인 정보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사용해왔다. 이번 사태는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기록시스템의 허점이 빚어낸 참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제 현 사태에 대한 분노를 넘어 재발방지를 위한 정부개조에 나서야 할 때이다.

전진한 | 바꿈 상임이사·알권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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