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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보다 앞서가는 나라에서 시대에 부응하는 새로운 행정법학이 등장하여 공법시스템 역시 더욱더 현대화되어 간다. 이에 반해 과거 민주적 법치국가원리가 제대로 구현되지 않은 시대에 만들어진 기본 틀이 강고한 우리의 현재 법상황은 매우 우려된다. 최근 이런 정체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규제 샌드박스’와 같은 일회적 수단이 강구되지만, 현재의 문제상황을 근원적으로 불식시킬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 과연 이런 정체현상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깊은 숙고가 필요하다. 

기왕의 공공법제는 관헌(관치)국가적 전통에서 행정을 공권력의 주체로, 국민을 행정의 객체로 설정하여 구축되었다. 가령 대부분의 행정법규정이 “…를 하고자 하는 자는 … 허가를 얻어야 한다”는 식으로 허가 여부를 행정청의 의무인지 재량인지 불분명하게 둠으로써, 국민은 행정처분이 이뤄지기만 기대할 뿐이고 그저 수동적 존재에 불과하다. 우리 법제도는 대부분 일본을 본뜬 것이다. 일제강점을 겪고 근대 법제도의 대부분이 그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식을 당한 우리로선 광복 이후에 국가체제를 만들고 운용하는 데 있어서, 특히 제3공화국 시대에 급속한 근대화와 산업화를 위해, 익숙한 일본의 법제도를 본보기로 삼아 국가의 기간 법제도를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후발국가가 앞서가는 국가를 벤치마킹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므로, 일본의 행정법이 우리 행정법의 모델이 된 것 자체를 비난하기는 어렵다. 우리와 일본이 국가시스템과 역사적 전통에서 매우 다름에도, 근본적인 차이점이 간과된 채 별다른 이론의 제기 없이 이런 차용의 결과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으며, 우리의 고유한 것이 되어 버렸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일본 공법은 한 세기 전의 메이지 헌법 시대에 대륙법, 대표적인 관헌국가인 프로이센의 공법을 모범으로 삼았다. 현재 일본 헌법질서의 연원이 된 메이지 헌법은 일왕(천황)주권을 바탕으로 국민이 아닌 신민을 통치 대상으로 하면서 관료를 그 매개체로 한 가부장적 국가시스템을 채용하였다. 외견적 입헌제이기에, 일본에서 관헌(관치)국가적 공법시스템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런데 임시정부가 1919년 4월11일 제정한, 임시정부 최초의 헌법문서인 ‘대한민국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 함’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대한민국임시헌법’(1919년 9월11일) 역시 주권재민을 규정한다(제1조). 한 세기 전에 우리 선조들은 국권이 상실 된 와중에도 국가의 근본이 민주공화제임을 표방하였다. 이는 동시대에 일본과 중국과는 완전히 다르다. 임시정부가 지향한 민주공화제의 참뜻이 제헌헌법은 물론 현행 헌법에까지 이어진다고 할 때, 공법시스템 전반에 드리운 일본의 관헌국가적 전통을 제거해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고, 현 세대의 책무이다. 

촛불집회를 계기로 광장의 민주주의가 현실이 되어 과거의 권위주의체제가 급속히 해체되고 있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구현되지 않는 법치주의는 자칫 그릇된 법실증주의나 명목상의 그것으로 전락할 우려가 있고, 아울러 법치주의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곳에선 자칫 민주주의가 사이비 거품민주주의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민주주의가 새롭게 다가온 이상, 관헌국가적 전통에서 벗어나 국민을 중심에 그리고 국가보다 앞세우는 것을 바탕으로 공법시스템을 완전히 새로이 정립하는 것이 진정한 극일(克日)이다.

<김중권 | 중앙대 교수 법학전문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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