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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내내 학원에서 고등학생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프랜차이즈 학원부터 시장통에 위치한 소규모 보습학원, 봉급은 종종 체불되었어도 함께 공부하는 기쁨을 일구었던 대안학교풍의 학원까지 수많은 곳을 거쳤다.

마지막으로 일한 곳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던, 그러나 수강생이 날로 줄어 힘겨워하던 대형학원이었다. 일흔을 넘긴 이사장은 젊은 날 검정고시 교습에 공헌하여 국가훈장도 받았다고 했다. 그분은 월요일마다 강사들을 불러 모아 교육윤리를 설파했다. 요지는 항상 같았다. 힘을 다해 일하라. 한편 실무를 담당하던 물리전공 교무주임 선생님은 학생들 표현을 빌리자면 ‘얼굴은 동자승, 머리는 대머리’였는데 클래식을 대단히 좋아했다. 자비로 구입한 오디오를 교무실에 두고 클래식 FM을 틀어놓았다.

비록 저물어가는 곳이었지만 프로의 자존심으로 버티던 다른 선생님들이 보시기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학생강사가 마뜩잖았을 거다. 전공 아닌 교과목을 가르치며 당치 않은 프로 시늉하느라 난 바싹 긴장해 있었다. 숨통을 틔워준 것은 쉬는 시간마다 교무실에서 들리던 아름다운 선율과, 알게 모르게 배려해주시던 교무주임이었다.

학부 마지막 기말시험 기간이었다. 다음날 민사소송법 시험이 있었고, 그날은 인근 두 고등학교 기말고사 시작일이기도 했다. 오후 3시부터 밤 11시 반까지 보충수업이 잡혀 있었다. 입으로는 기출문제를 풀어주는데 머릿속에선 펴보지 못한 민사소송법 책이 아른거렸다. 지치고 막막해 부품 보관하는 창고로 숨어들어 울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나를 발견한 교무주임은 “아, 담배 좀 피우려고….” 얼버무리며 얼른 나갔다. ‘무슨 담배를 창고에서 피우나?’ 하며 눈가를 소매로 문지르고 교무실로 가니 학생들이 몰려와 밤 10시에 갑자기 물리 보충이 잡혔다 했다. 물리시험은 며칠 후인데 ‘동자승’이 꼭 오늘 밤 보충해야 한댔다고. 잠시 후 들어온 교무주임 선생님은 무심한 어투로 말했다. “마지막 보충 취소됐으니 선생님은 퇴근하세요.” 반짝이던 그분 머리가 보석처럼 보이던 찰나였다. 가방을 챙겨 나오는데 늘 그렇듯 켜져 있던 클래식 FM에서 모차르트의 ‘반짝반짝 작은 별’ 변주곡이 명랑하게 연주되었다.

<안개 속의 풍경>(테오도로스 앙겔로풀로스·1988)이란 영화를 보면, 세상에 내던져져 할퀴어진 어린 주인공이 몸을 팔아서라도 여비를 구하고자 역전에서 군인 아저씨한테 다가서는 장면이 나온다. 젊은 병사는 아이 말뜻을 처음엔 이해 못하였다가 이내 당혹스러워하다가, 불쾌해하며 자리를 피한다. 화물칸 사이를 착잡한 표정으로 서성이던 그는 거기까지 찾아든 소녀에게 기차 삯에 달할 만큼의 돈을 쥐여주고 서둘러 가버린다. 그걸로 표를 구매한 소녀가 동생과 나란히 열차의자에 앉아 있던 다음 장면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잊고 지냈던 한 시기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공부하고 가르치며 밥 벌어먹게 되기까지, 돌이켜보면 먹고살 길이 실제로 끊긴 적은 없었다. 그래서 막연한 배짱 같은 걸 가졌더랬다. 나 하나 건사할 길은 어떻게든 계속 열리겠지, 하는. 그렇게 열어준 것은 세상 너머로부터의 자비로운 손길이었겠지만, 이는 땅 위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의 크고 작은 호의를 경유하여 비로소 일용할 양식의 형태로 손에 쥐어졌다. 위 영화 속 소녀가 국경을 넘어 ‘아버지 나라’에 다다를 것이 아버지에 의해 예정된 선물이었다 할지라도 그곳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잠시 지친 몸을 누이도록 해준 것은 한 인간의 별것 아닌 선의였던 것처럼.

그해 겨울 입시학원 교무실이 생각난다. 반짝반짝 작은 별 변주곡이 귓가에 맴돈다. 가난했던 나는 그 미소한 배려들이 얼마나 세심히 마련되었을지 헤아려보지 않은 채 주는 대로 받았다. 받은 자로서 무얼 하면 될지, 은혜 갚은 까치의 시점에서 골똘해본다. 생의 여정 중 맞닥뜨릴 고단한 이들에게 몸을 누일 열차 칸을 그때그때 내어놓는 것, 그리고 주는 대로 받는 누군가를 만나거들랑 나 또한 ‘그럼에도 재차 뭘 내미는’ 호구가 되는 것. 이는 일생을 두고 행해야 할 작업이므로, 일단 오늘 밤엔 하늘의 별처럼 많은 고마움들 가운데 하나를 글로 옮기어 사람들과 나누기로 한다.

<이소영 제주대 교수 사회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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