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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경제포럼(WEF)에서는 2019년부터 ‘등대공장’(lighthouse factory)을 선정하고 있다. ‘등대공장’이란 인공지능(AI), 빅데이터, 사물인터넷(IoT) 등 이른바 4차 산업혁명 기술을 적극 도입해 제조 산업의 미래를 이끄는 등대 같은 공장을 말한다. 지금까지 독일의 BMW, 미국의 존슨앤드존슨, 핀란드의 노키아, 인도의 타타스틸 등 세계적인 기업 26개가 이름을 올렸다. 우리나라에서는 포스코가 유일하게 지난 7월 중국 다롄(大連)에서 열린 2019 WEF에서 세계의 등대공장으로 선정됐다. 포스코가 AI기술을 활용해 생산성과 품질을 향상하고, 대학, 스타트업, 중소기업, 지역사회와 협력해 스마트 공장 플랫폼을 구축한 것이 선정 이유다.

포스코는 ‘제철보국’을 경영이념으로 지난 50년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국민기업이다. 1968년 창사 이래 한국의 산업화를 떠받쳐왔을 뿐 아니라 현재는 연간 4300만t의 조강생산체제를 갖추고 세계 53개국에서 생산과 판매 네트워크를 구축한 세계적인 철강회사로 자리 잡았다. 그런 포스코가 지난해 ‘더불어 함께 발전하는 기업시민’을 새로운 경영이념으로 정하고 영속 기업으로 발전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기업시민(企業市民)’은 미국에서 2000년대 초에 등장한 개념으로 첫째,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을 기업경영의 주요한 축으로 삼아야 한다는 발상이다. 시민 개개인이 공동체가 합의하고 부여한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다하듯 기업에도 사회발전을 위한 시민의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기업이 눈앞의 이익만 좇지 말고 공동체의 지속발전을 위한 책임을 다하라는 주문이다. 기업이 시민의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력은 정부나 국제기구보다 크다. 따라서 그 영향력에 맞게 의무와 책임을 기업에 지우는 것은 당연하다. 둘째, 오늘날 기업의 경영에는 당면한 사회문제 해결에 보다 적극적이고 광범위한 참여를 요구하는 사회적 책임이 강조되고 있을 뿐 아니라, 이해관계자(stakeholder)의 역할 및 참여도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기업들이 전통적인 생산 관점에서 벗어나 이해관계자 관점으로의 전환을 촉진한다. 이해관계자란 기업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주고 또 그 의사결정에 영향을 받는 집단을 말한다. ‘기업시민’은 바로 이러한 이해관계자, 즉 전통적인 주주를 포함하여 소비자, 지역사회 등과 더불어 함께 발전하는 영속 기업을 지향하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지금까지 많은 기업들이 영리 추구에만 몰두하다가 사회의 지탄을 받고 몰락의 길을 자초하였다. 기업(企業)으로서의 경제적 가치와 시민(市民)으로서의 사회적 가치가 맞물려 선순환을 일으켜야만 영속할 수 있다는 기업 경영 모델의 전환은 새로운 혁신의 단초를 마련해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포스코가 천명한 ‘기업시민’의 경영이념은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이익집단을 넘어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적극 행동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는 점에서 매우 적절하고 환영할 만하다. 포스코뿐만 아니라 SK 등 다른 대기업에서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구현할 다양한 방식을 고민하고 적극 실천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생색내기식 모습과는 전혀 다른 고무적인 흐름이다. 우리 대기업들이 사회적 책임에 기반한 가치경영이 이제 선택이 아니라 기업 생존의 필수요건이 되었음을 인지한 것이다. 

그러면 ‘기업시민’ 경영이념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내가 오랫동안 동반성장 전도사를 자임하면서 가장 힘주어 강조해온 대기업의 자발적 동반성장 참여가 바로 그 구현 방안이 될 수 있다. 이윤 창출이라는 기업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면서도 지속 가능하고 건강한 산업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무엇보다도 대기업의 자율적이고 적극적인 참여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마케팅의 저명 학자 필립 코틀러도 ‘선행(good works)’은 이제 기업 생존과 번영의 필수조건이 되었고, 공익과 기업 이익 간 균형을 이루는 것이 미래 기업의 생존전략이라고 강조하였다. 과거에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단순히 ‘남는 파이’를 나누는 활동이었다면, 지금은 기업이 사업 목표를 세우고 실현하는 과정에서 공익과 기업 이익의 균형을 위해 ‘파이를 키워서 나누는’ 방식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남의 것을 빼앗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다 함께 파이를 키워 나누자’는 동반성장의 철학이 담겨 있다. 대기업들이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가 선순환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창출하겠다는 ‘기업시민’의 경영이념은 대기업 스스로 동반성장을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써 구현될 수 있다.

대기업의 자발적·적극적 동반성장 참여는 최근 부각된 글로벌 밸류체인의 불확실성에 대처하는 필수적 방안이기도 하다.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는 비교우위론에 입각한 국제 분업을 토대로 발전해왔다. 이것은 전 세계 기업들이 원료에서부터 최종 제품에 이르는 생산 밸류체인에서 각자 비교우위가 있는 분야로 특화해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최근 일본이 수출규제 조치로 이러한 국제 분업체계의 고리에 타격을 가했다. 일본의 조치는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우리도 깊게 짚어봐야 할 부분이 있다.

이미 글로벌 경쟁의 패러다임이 단일기업 간 경쟁에서 기업생태계 간 경쟁으로 바뀌었다. 자동차를 예로 들면 도요타와 현대자동차의 경쟁에서 ‘도요타+협력업체’ 대(對) ‘현대자동차+협력업체’의 경쟁으로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는 말이다. 대기업이 자발적으로 적극 나서 대·중소기업 간 양극화를 해소하고 환경·안전 문제를 개선하며 중소기업이 혁신 성장하면, 국내 산업의 공급망이 건실해져 불확실성이 커지는 글로벌 밸류체인에 의연히 대처할 힘을 기를 수 있다. 기업시민 나아가 동반성장이 새로운 성장 공식이자 경쟁우위의 원천이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원전 280년경 이집트의 파로스(Pharos)섬에는 높이가 130m에 이르는 거대한 등대(lighthouse)가 세워졌다. 그 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세상의 문물이 모이고 나가는 허브가 되었고, 문화와 문명이 교차하는 플랫폼이 되었다. 포스코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대기업 모두가 동반성장에 전면적으로 나서 새로운 전환의 국면에 접어든 우리나라 제조 산업에 새로운 항로를 인도하는 듬직한 등대가 되어주길 희망해본다.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한국야구위원회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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