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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항쟁 두 달 전인 1980년 3월24일, 중남미 엘살바도르에서 가난한 백성을 편들던 로메로 대주교가 미사 설교 도중 군인의 총에 살해됐다. 그후 35년이 지난 2015년 5월23일 로메로는 가톨릭 신자로서 최고 영예인 성인 직전의 복자품에 올랐다. 그의 훌륭한 삶과 죽음이 가톨릭교회에 의해 공식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로메로는 왜 이제야 복자로 인정되었을까. 가난한 사람을 위해 싸우다 목숨을 잃은 성직자가 교회에서 신앙의 모범이냐를 두고 오랜 논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로메로의 죽음이 신앙 때문에 생긴 것인지를 두고 신학자들의 의견은 엇갈렸다. 로메로가 자신의 정치적 태도 탓에 숨졌다고 주장하는 보수파 신학자들은 그의 시복을 반대해왔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의 결단으로 그의 시복이 이루어졌다.
엘살바도르 수도 산살바도르의 한 건물에 19일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대형 사진이 내걸려 있다. 엘살바도르 군사 독재정권에 저항하다 1980년 미사 도중 암살당한 로메로 대주교는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순교자로 인정받았으며 23일 시복될 예정이다. _ AP연합
20세기 중반부터 남미에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불의한 권력에 죽임을 당했다. 살인자들은 대부분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신앙을 보호한다는 명분에서 살인을 정당화했다. 그들의 죽음은, 교회법이나 교리적으로 정해진 조건과 자격이 없어서, 그리스도교적으로 특별한 죽음으로 여겨지지 못했다. 1984년 임종 직전의 칼 라너는 이러한 상황을 보며 순교에 대한 개념을 넓힐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로메로 대주교가 깊은 그리스도교적 확신에서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에 참여하여 희생됐다 해서 그를 순교자라 부르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초대교회는 박해와 순교를 신앙의 저항적 성격 덕분에 생긴 당연한 결과로 여겼다. 순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고, 하느님이 베푸는 가장 큰 은총이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귀한 사랑으로 이해됐다. 역사를 거치면서 순교는 신학적으로 더 정교해졌고, 교회법적으로 ‘신앙에 대한 미움’에 의해 생기는 죽음이라고 정의됐다.
가장 그리스도교적 죽음은 예수의 죽음이었다. 최초의 순교자는 예수였다. 예수의 죽음을 가장 닮은 죽음은 순교다. 정의를 위한 죽음은 예수의 죽음에 더 가깝다. 순교자들은 교회 안에서 살고 죽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교회의 순교자뿐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순교자요 인류의 순교자다. 가톨릭교회가 로메로를 영예롭게 한 것이 아니라, 로메로가 교회를 영예롭게 한 것이다.
‘종교는 정권이 아니라 백성을 상대한다’는 로메로의 말을 우리 정치인에게 소개하고 싶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 거짓말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는 그의 말을 언론인과 지식인에게 전하고 싶다. ‘주교는 백성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그의 말을 주교에게 전하고 싶다. “그리스도의 해방은 그 어떤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해방보다 더 완전하고 깊다”는 그의 말을 사제에게 들려주고 싶다. ‘평신도는 예언자가 돼야 한다’는 그의 말을 신자에게 전하고 싶다. 로메로 시복은 가난한 사람을 편들지 않는 신앙과 영성은 의미 없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정의를 위한 투쟁이 신앙에서 큰 가치를 지니며, 불의한 세력과 싸우지 않는 복음 선포는 없다는 뜻이다. 로메로처럼 가난한 사람들과 가까이하는 종교인은 언젠가 회개의 기쁨을 누린다. 부자와 권력자와 가까이하는 종교인은 결국 몰락하고 만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로메로는 희망이었지만, 로메로의 존재가 불편한 사람들은 교회 안에도 여전히 많다. 그들은 로메로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로메로를 기억해야 한다. 저항하기 위해 기억해야 하고, 기억하기 위해 저항해야 한다. 예수처럼 로메로는 저항하는 인간이었다. 20세기에 예수를 가장 닮은 사람으로 로메로를 꼽고 싶다.
또한 로메로처럼 죽임당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죽음을 통해 세상의 악과 고통과 억압자의 정체를 폭로하고 있다. 교회는 그런 죽음이 신학적으로 크게 가치 있음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정의를 위한 죽음이 종교에나 인류에게 무의미할 수는 없다. 로메로의 시복을 기뻐하며 세계 곳곳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을 기억한다. 고통 앞에 중립 없듯, 억울한 죽음 앞에 중립 없다.
김근수 | 가톨릭프레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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