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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금융위기(2008년)의 여파가 남아 있던 2011년 초 영국. 야당인 노동당 대표 에드 밀리밴드는 한 라디오 프로에 출연해 경제위기 속에서 고통받고 있던 중산층을 ‘쥐어짜인(squeezed)’ 상태라고 진단했다. 임금은 오르지 않는데 주거·의료·교육비는 꾸준히 상승해 중산층이 고통받는 상황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는 이를 타개할 유일한 수단이 정부의 재정정책이건만, 집권 보수당 정부는 긴축을 기조로 공공지출을 삭감하며 중하위 소득계층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어째 이 장면이 낯설지 않다. 실질소득의 하락으로 고통받고 있는 중산층, 점점 증가하는 빈곤층, 그리고 시퍼렇게 날선 비판에 앞장서는 언론과 야당까지. 자유한국당 추경호 의원실의 분석을 인용한 중앙일보의 보도(2019년 9월4일자)에 의하면, 중위소득 50~150% 소득계층이 2015년 69.5%에서 2019년 59.9%로 하락한 반면, 빈곤층이라 할 수 있는 50% 미만 소득계층은 같은 기간 12.9%에서 17.0%로 증가하였다. 핵심은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정책은 분배의 측면에서도 전혀 효과가 없다는 것이고, 정부가 유리한 지표만 취사선택하며 정책 효과를 과장하고 있다는 의심을 덧붙이고 있다.
쪼그라든 중산층과 증가하는 빈곤층은 진보세력이 사회개혁을 요구하며 인용하는 대표적 지표다. 그런데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보수 야당과 언론이 이를 집중 조명한다. 정부가 만든 통계로 정부의 정책 실패를 계량화하니, 차도지계(借刀之計)도 이만한 게 없다. 하지만 쪼그라든 중산층의 통계를 이치에 맞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몇 가지 되새김질이 필요하다.
하나. 통계는 객관성으로 위장된 매우 이념적 도구다. 진영마다 자기에게 유리한 수치만 제시하고 해석한다. 앞의 보도에서 2015년 이후 중산층이 69.5%에서 59.9%로 거의 10%포인트 가까이 감소한 건 맞지만, 이들이 모두 빈곤층이 된 건 아니다. 오히려 줄어든 중산층의 60%는 중위소득 150% 이상의 상위 소득계층으로 편입돼, 상위 소득계층의 비율이 같은 기간 17.6%에서 23.1%로 증가했다. 중산층이 10%포인트 감소했다는 것과 빈곤층이 4%포인트 증가했다는 건, ‘같은 통계, 다른 느낌’을 전하기에 충분하다.
둘. 중위소득을 기준으로 한 중산층의 감소는 소득불평등이 심화된 결과다. 중산층 감소는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 경제 질서의 확대에 따른 전 세계적 현상이다. IMF 모범생 한국도 신자유주의적 처방에 기대어 경제위기를 극복했지만, 양극화라는 뼈아픈 비용을 치르고 있다. 최근의 나빠진 통계수치들도 2015년 이후의 추세선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어서, 현 정부의 정책 실패로 해석되기엔 시기상조다. 오히려 심화되는 양극화는 중하위 계층의 실질소득을 증가시키기 위한 정부 정책의 필요성을 방증한다.
셋. 중산층 감소보다 빈곤층 증가에 정책 대응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 성숙된 연금제도를 가진 선진 복지국가들과 달리 우리나라 빈곤층의 대부분은 노인들이다. 노인빈곤의 문제를 최저임금이나 일자리창출과 같은 노동시장정책으로 대응하기엔 근본적 한계가 있다. 기초연금 인상과 같은 공적이전의 확대가 가장 효과적이나, 막대한 재정이 소요되므로 전반적 노후소득보장제도의 틀 안에서 장단기 대책을 분리해 접근해야 한다. 무엇보다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를 차질 없이 시행하는 게 급선무다.
<김진욱 | 서강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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