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지난달 23일 금융노조 파업과 함께 시작된 공공노조 파업이 3주차에 접어들었다. 파업을 대하는 국가권력과 보수언론은 언제나 그랬듯이 “불법”으로 시작해서 “이기주의자”라는 낙인으로 끝을 맺는다. 개혁, 효율화, 정상화, 선진화 등 좋은 단어는 모두 권력자들의 언어였고, 귀족노조, 철밥통, 경제위기 주범 등 혐오로 가득 찬 단어는 투쟁하는 노동자에게 덧씌워진 천형이다.
그런데 “불편해도 괜찮아, 힘내라 공공노조” 시민들의 자발적인 연대는 파업 노동자들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용기가 되고 있다.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압도적 다수의 국민들은 정부가 강행하는 성과연봉제를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통령은 연일 “국민 동의 없는 명분 없는 파업”으로 매도했지만 국민들은 시대 변화를 공감하지 못하는 국정 최고책임자를 걱정할 뿐이었다.
정부의 '화물운송시장 발전방안' 폐기를 주장하며 총파업에 돌입한 화물연대 노조원들이 10일 경기도 의왕 내륙컨테이너기지(ICD)앞에서 파업출정식을 갖고 있다. 서성일 기자
파업은 불편할 수 있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전제하에 민영화는 위험하다는 시민들의 깊은 혜안을 표현한 것이리라. 불편은 잠시 참을 수 있지만 국가와 사회를 구조적 위험에 빠뜨리는 공공부문 시장화에 대한 분명한 경고이다. 서구에서 발전한 진보정당과 복지국가를 노동운동이 잉태한 ‘한 어머니의 두 아이’라고 했다면, 그리고 계급타협의 산물인 복지국가에 대한 시장의 공격이 신자유주의의 이론적 배경이라고 한다면 변변한 복지제도조차 없는 우리에게 몰아닥친 저주는 전통적인 신자유주의와도 한참 거리가 먼 것이다.
보편적 복지의 담지자로서 공공부문 형성의 역사가 일천한 한국사회에서 민영화는 한때 군부독재에 반대되는 것으로 포장되기도 했다. 공공서비스 이용자이고 실제 소유주인 시민의 경영참여가 원천적으로 배제된 공기업은 낙하산 천국이 되고 말았다. 전체주의국가에서 공공서비스가 시민의 권리로 인식되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국가권력은 정치혐오를 부추겨 정권연장을 꾀하듯이 국가의 실패를 공기업 사유화, 시장화 명분으로 삼았다.
‘때늦은 개화와 때이른 조락’이라는 탄식이 사회구조변화에 조응하지 못했던 필자를 비롯한 노동운동 지도부들에 대한 비판이었듯이 주류 신자유주의 국가가 가계소득주도 성장으로 경제위기 탈출을 시도하는 지금 우리는 ‘때늦은 신자유주의 개화’ 속에 정치적 자유주의조차 위협받고 있다. 변종 신자유주의국가에서 고통받는 청년들에게는 ‘헬조선’이 아니면 달리 어떤 표현이 있을까. 따라서 지금 우리의 투쟁은 노동운동의 사회화를 이루어내지 못한 기성세대 노동자로서의 반성이다.
한편 시민사회의 도도한 변화와는 달리 오늘 우리가 파업현장에서 목도하고 있는 국가의 실체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보루가 아니라 헌법적 가치인 파업권 무력화가 국정의 최고 목표가 되어버린 ‘독점적 폭력기구’에 불과하다. 연일 안보위기를 강조하면서도 전선을 이탈해 파업 파괴를 위해 투입된 특전사 군인들을 보라. 철도공사 인턴으로 일했다가 채용에 탈락한 청년들에게 폐기했어야 할 개인정보를 이용해 ‘대체근무를 하면 가산점’을 주겠다는 회유는 인권보다 파업파괴가 우선하는 가치임을 보여준다. 파업 시 투입되는 대체근무자에 대한 일반화된 국제적 용어는 파업파괴자(strikebreaker)이다. 일제강점기 전시 총동원령하에서 제정된 ‘업무방해죄’로 노조지도부를 처벌하겠다는 국가에 파업노동자들은 보호해야 할 국민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내부의 적’이다.
생때같은 아이들을 한 명도 구하지 못한 대통령은 느닷없이 ‘국가 개조’를 들고나왔다. 평소 정권에 대한 반대를 국가전복세력이라고 국가와 정권을 동일시하던 정부가 스스로를 개조하겠다던 국가는 개조됐는가. 물대포 직사로 사망한 농민을 ‘병사’라고 우기는 국가는 임금체계를 둘러싼 노동자의 투쟁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안전의 외주화가 낳은 ‘김군의 억울한 죽음’ 앞에 ‘너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위로했던 시민들은 ‘불의한 권력에 굴복하지 말 것’을 명령하고 있다.
“미래를 잃어버린 청년들은 예비노동자였고, 자영업자로 내몰린 가장들은 구조조정된 어제의 노동자였다. 우리 모두는 서로를 배려하는 평범한 이웃들이다”라는 조직 노동자들의 마지막 호소에 시민들은 연대로 화답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2016년 가을 공공노조의 파업은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 이후 서로 다른 길을 걸었던 또 다른 우리, 시민과 노동자가 새롭게 만나는 ‘사회개조’의 출발점은 아닐까. 노동자의 저항에 손을 잡아준 시민의 외침은 무능한 국가와 시장의 탐욕이 지켜주지 못한 아이들과 고 백남기 어르신께 드리는 우리 모두의 추모사이다.
김영훈 전국철도노동조합 위원장
'주제별 > 노동, 비정규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설]지하철 1호선 사고, 위험 감수 말고 노사 대화 나서라 (0) | 2016.10.18 |
---|---|
[사설]성과연봉제 유보한 서울대병원 노사 합의를 환영한다 (0) | 2016.10.17 |
메탄올에 시력 잃은 노동자 찾아나서야 (0) | 2016.10.11 |
[사설]화물연대도 총파업, 정부가 대화에 나서라 (0) | 2016.10.11 |
[사설]법무부와 노동부도 합법으로 판단한 파업 (0) | 2016.1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