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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1심에서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이 블랙리스트 무죄, 위증 유죄라며 석방되었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서 삼성의 뇌물 공여 혐의가 드러나면서 삼성전자 부회장 이재용에 대한 특검의 구속 수사와 재판이 진행되고 있지만, 변호인단은 경영권 승계자인 이재용만 모르게 이건희 회장과 삼성 미래전략실 차원에서 경영 승계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 블랙리스트 재판에 조윤선이 없고, 삼성의 경영권 승계 과정에 이재용이 없다. 각본 없는 드라마가 아니라 주인공 없는 법정이 이들의 목표로 보인다.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는 서유럽 역사를 살펴보면 합스부르크와 부르봉 가문 등 몇몇 주요 가문이 여러 국가를 분봉하여 통치했다. 당시 사람들은 왕족과 귀족은 평민과 달리 ‘푸른 피(Blue Blood)’를 지녔다고 생각했다. 세습에 의한 ‘혈연 엘리트(Blood Elite)’의 통치는 근대 시민혁명 이전까지 당연한 일이었고, 수천년간 의심받지 않았다. 특별한 피를 이어받아야만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권리(주권)가 있다는 왕권신수설을 넘어, 평범한 시민이 공화국의 주인이 되기까지 인류는 오랜 세월에 걸쳐 투쟁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 사진)과 박영수 특별검사가 7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결심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김기남기자 kknphoto@kyunghyang.com·연합뉴스

우리 역시 1987년 민주화와 노동자 대투쟁으로부터 2017 촛불혁명에 이르는 힘든 과정을 통해 비로소 민주공화국 시민의 정체성과 자의식을 획득할 수 있었다.

지난 30년 동안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권력에 대한 비판과 성찰을 통해 오늘에 이르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제대로 된 비판이나 성찰 없이 꾸준하게 최고의 권력을 누려온 것이 바로 기업 권력이다. 아니, 온갖 비판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국가권력과 언론권력을 길들이며 불가침의 성역이 되었다.

국가권력과 부당하게 야합하여 결과적으로 외환위기를 자초했지만, 이 시기를 전후하여 비판지성의 생산지가 되어야 할 서울의 일류대학들은 앞다퉈 재벌 기업 총수들을 불러들여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고, 기업 총수들은 보답으로 자신의 이름이나 기업명을 딴 신축 건물을 지어주었다. 기업권력을 비판하고 감시해야 할 언론 역시 재벌이 쥐여주는 광고의 단물에 취해 감시를 소홀히 하고 기업의 나팔수가 되었다.

특히 삼성은 ‘삼성이 하면 뭔가 다르다’는 대중의 인식과 자본에 길들여진 언론의 비호 속에서 그들이 국가 경제에 기여하는 정도에 비해 과도한 지위를 누려왔다. “삼성이 국가 성장을 견인할 뿐만 아니라 국가경영을 주도한다”는 삼성이데올로기는 민주화 이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초래한 국가적 위기상황 속에서 하나의 신앙이 되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삼성을 비롯한 재벌기업들이 경영권을 대물림하면서 국가공동체의 가치 실현을 위한 어떤 책임 있는 태도를 지녀왔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가 불러온 삶의 위기 속에서 대중은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삶의 척박함, 생존의 어려움은 대중의 분노를 자아냈지만, 이 분노는 연대를 통한 극복이 아닌 자기계발과 계층상승을 통한 각자도생으로 향했다. 기업지배사회가 된 대한민국은 이후 어떤 윤리적 규범이나 규칙에 구애받지 않고 오직 ‘부’의 욕망을 추구하는 자들의 세계가 되었다. CEO의 영웅화가 초래한 참혹한 실상은 ‘갑질공화국’으로 나타났다. 2007년부터 2017년까지 10년 동안 언론에 등장한 기업 CEO들의 대표적인 갑질만 언급해도 지면을 다 채울 지경이다.

어느덧 3세, 4세에 이르게 된 경영권 승계자들은 자신의 뛰어난 능력으로 지금의 지위를 누리게 된 것일까? 과연 기업은 대한민국의 권력 구조, 경제시스템, 서민과 중소기업의 희생을 강요하는 정책과 무관하게 오로지 그들의 노력과 혁신으로 성공한 것일까? 신자유주의 이후 우리는 “국가와 국민을 위한 기업이 아니라 기업을 위한 국가”에서 살아가는 기업국가의 국민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 민주화 없는 국가의 민주화는 불가능하며, 주권을 능가하는 경영권에 대한 노동자의 참여와 시민의 감독이 필요하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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