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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등장한 아케이드게임 ‘바다이야기’는 독특한 중독성에 힘입어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바다이야기’나 그 아류 게임기가 늘어선 성인오락실이 주택가 곳곳으로 파고들었고, 어느새 넥타이 차림의 직장인들이 오락실에서 밤을 지새우는 풍경이 낯설지 않게 됐다. 상품으로 주어지던 문화상품권이 현금으로 곧장 환금된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비난 여론이 빗발치자 정부는 뒤늦게 단속에 착수했다. 사전 심의를 받았음에도 사행성이 걸러지지 못한 점은 특혜 의혹으로 번졌고, 고 노무현 대통령의 친·인척까지 거론된 이른바 ‘바다이야기 게이트’로 일파만파 확산됐다.

벌써 10년도 더 된 바다이야기를 새삼스럽게 꺼내는 이유는 최근 국정감사장에서 바다이야기라는 단어가 다시 들려왔기 때문이다.

발언의 주인공은 여명숙 게임물관리위원장이었다. 여 위원장은 최근 게임업체들이 앞다퉈 내놓는 모바일게임의 ‘확률형 아이템’을 두고 “예고된 바다이야기”라고 했다. 그만큼 도박성과 중독성이 짙고, 만만치 않은 부작용을 예고하고 있다는 얘기다.

여 위원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확률형 아이템’은 “노력 없이 (좋은 상품이) 나올 때까지 계속 돈을 투입하는 뽑기”다.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르는 러키박스 같은 상품을 구입해 게임 내 자신의 캐릭터를 강하게 만들어줄 아이템이 나올 때까지 상자를 반복해서 구입하는 게 기본적인 ‘확률형 아이템’의 구조다. 여 위원장은 이를 “완벽한 도박”이라고 했다. 일례로 국감장에서 공개된 모바일게임 ‘리니지M’의 고급 무기 ‘커츠의 검’ 획득 확률은 0.0001%다. 이는 경마 삼쌍승식(말 10마리가 출전하는 경주에서 1~3등을 한 번에 맞히는 방식) 적중확률 0.139%, 카지노 슬롯머신 잭팟 적중확률 0.0003%보다도 낮은 수준이자 로또 2등에 당첨될 확률과 같다고 한다.

문제는 최근 유행하는 모바일게임의 경우 이 뽑기에 한도가 없다는 점이다. 좋은 아이템이 나올 때까지 수백만~수천만원을 써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다. PC게임의 경우 결제한도가 50만원으로 정해져 있고, 유명무실하다고는 해도 로또와 경마도 게임당 10만원의 구매 상한선이 정해져 있다.

무엇보다 모바일게임의 주 소비층은 청소년이다. 현실에서 미성년자는 복권도 마권도 살 수 없다. “어린아이들이 확률형 게임을 통해서 도박을 경험한다. 언론에 보도된 1500만원, 4000만원을 날린 초등학생, 중학생처럼 (어린아이들이) 도박에 빠지고 있다”(더불어민주당 손혜원 의원)는 지적을 지나치기가 어려운 이유다.

게임업체들은 억울해하고 있지만, 인기 있는 모바일게임의 경우 거래전문 사이트에서 캐릭터나 아이템이 현금으로 거래되는 환금성까지 갖췄다. 사정이 이렇지만 정부는 ‘진흥’을 이유로 ‘확률형 아이템’을 자율 규제라는 규제 사각지대로 밀어넣었다. 업계 자율로 게임 내 판매되는 ‘확률형 아이템’의 확률을 공개하고, 이를 공개하지 않을 경우 미준수 게임에 대해 명단을 공개하는 정도다. 강제성도 없고, 명확한 가이드라인도 없다. 미준수 업체 리스트는 아직까지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다.

확률형 아이템의 판매 호조에 힘입어 넥슨과 엔씨소프트, 넷마블 등 국내 대표 게임업체들은 전례 없는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다. 하지만 ‘대안을 고민하자’는 요청에는 묵묵부답이다. 국회의 자료제출 요구에는 불응하고, 증인 출석요구도 거부하고 있다.

확률형 아이템 규제가 이뤄지지 않는 이유를 묻자 여 위원장은 “확률형 아이템 규제 논의를 할 때마다 공회전이 된다”며 “게임판의 농단이 심각하다”고 했다. 규제를 막으려는 구체적인 움직임과 세력이 있다는 주장이다. 업계의 배를 불리기 위해 청소년을 사행성 중독으로 내모는 세력이라니…. 순간 귀를 의심했다. 부디 그의 착각이었기를 바랄 뿐이다.

<산업부 | 이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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