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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국가 대항전 중 가장 주목도가 높은 것은 역시 한·일전이다. 지난달 일본 도쿄에서 열린 2019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 프리미어12를 취재하던 기자들의 주요 관심사도 누가 일본전 선발투수로 등판하느냐였다. 한국 야구대표팀은 보안상의 이유로 일본전 선발을 비밀에 부치고 있었다.

기자들은 공 잘 던지기로 이름난 투수들을 유력 후보로 꼽아가며 추리에 열을 올렸다. 대회가 하루하루 진행되던 어느날 문득 한 투수가 홀연히 기자들 사이에서 일본전 선발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했는데 누가 봐도 뜻밖이었던 스무 살의 신예였다.

혹시나 했던 일은 일어났다. 2020 도쿄 올림픽 출전권을 확보해 여유가 생긴 대표팀이 일본전 선발로 이 젊은 투수를 낙점한 것이다. 베테랑 투수가 등판할 것이라 추측했던 한국 기자들과 일본 대표팀의 허를 찌른, 흥미로운 선택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기자들만 깜깜이였을 뿐 코칭스태프는 계획이 다 있었다. 대회가 개막하기 전에 경기 운영 시나리오를 만들어놓고, 올림픽 출전이 확정되고 남은 경기에 이 투수를 쓰겠다는 밑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기자들이 감독의 용병술이나 작전 등 경기 운영의 세세한 부분에 대해 시시콜콜 비판 기사를 쓰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다. 현장의 야구인들은 외부인들이 알 수 없는 정보를 손에 쥐고 외부인들은 생각지도 못한 수 싸움을 한다. 더그아웃 뒤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르면서 감독에게 섣불리 훈수 두는 것은 실체 없는 허깨비와 씨름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지난해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선 야구를 잘 모르는 국회의원 손혜원이 노련한 야구인 선동열을 야구 문제를 두고 질타하는 코미디가 벌어졌다.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대표팀 선수의 병역 특례가 발단이 된 이 국감에서 국회의원들은 국가대표 선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을 넘어 “우승이 어려운 것이라고 다들 생각하지 않는다”는 모욕적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병역 특례를 향한 시민들의 분노에 편승했던 손혜원은 자신이 ‘야알못(아구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만 증명했을 뿐, 경솔한 언행으로 결국 역풍을 맞았다.

하지만 대표팀 감독이 국감에 불려나간 이 초유의 사태는 야구인들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이는 프리미어12 국가대표를 선발할 때도 부지불식간 작용했다. 행여 꼬투리 잡힐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철저히 기록 위주로 선수를 선발했다.

그러나 야구도 사람이 하는 일이고 사람에겐 기록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선수 개개인의 개성과 장점은 통계에 오롯이 담기지 않는다. 수비할 때 첫발을 내딛는 방향과 반응 속도, 상대 투수의 버릇을 읽어 2루를 훔치는 눈썰미, 큰 경기일수록 배짱이 두둑해지는 투수의 담력을 숫자는 표현하지 못한다. 기록만으로 국가대표를 선발하려고 하면 오히려 이모저모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는 선수를 배제하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국방부는 지난달 21일 ‘병역 대체복무제도 개선 계획’을 발표하면서 “국가대표 선발의 구체적 기준·과정 및 관련 자료를 대외에 공개하는 등 공정성·투명성을 대폭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야구도 이 방침을 따르게 될 것이다. 도쿄 올림픽 대표팀 선발의 첫 번째 원칙은 물론 성적이다. 같은 성적이면 병역 미필자를 뽑았던 관행도 국민 정서에 비춰보면 반성할 부분이 있다. 그러나 ‘손혜원 프레임’에 갇혀 쓸모 있는 선수를 발탁하지 못하는 것도 전력에 마이너스가 될 수 있다. 어차피 모두를 만족시키는 대표팀 구성은 불가능하다.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전문가의 시야로, 공정하면서도 소신 있게 선수를 선발해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게 야구인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최희진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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