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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를 봤다. 트로트 가수로 데뷔하게 된 ‘유산슬’ 유재석씨가 ‘합정역 5번 출구’를 녹음하는 과정을 담았다. 그 ‘업계’의 고수들, 이른바 ‘세션맨’들이 거의 ‘원샷 원킬’로 연주하는 모습은 흐뭇했다. 과연 ‘인생도처 유상수’라, 세상의 모든 분야에는 마땅히 고개를 숙일 만한 고수들이 있다고 했던가. 한편 예능 프로라서 맘껏 웃기도 했지만 또한 그 고수들이 살아냈을 세월을 짐작하니 조금은 숙연한 느낌도 없지 않았다. 어느 분야든 묵묵히 한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있는 법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어디 음악계만 그러하랴.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일하는 분야에서는 그와 같은 고수들, 장인들, 누군가를 빛내는 세션의 자리, 묵묵히 그 분야를 오랫동안 떠받치고 살아온 사람들이 있다. ‘머리’로 일하는 사람들은, 뭐라도 조금 틀리거나 어긋나면 대체로 다시 쓰거나 말로 하면 그만이지만 ‘몸’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정교하게, 그야말로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일한다. 그래야 전후가 맞아 주춧돌이 놓이고 좌우가 맞아 대들보가 올라간다.
스포츠계 역시 두말할 것도 없다. 물론 ‘머리’도 쓰는 스포츠지만 그 일의 수행 과정 전체는 기본적으로 ‘몸’이 작동한다. 그 몸의 세계에 수많은 사람들이 활동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몸으로 활동하여 스타 선수를 건사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몸으로 움직여 스타 감독을 지켜낸다. 결국 스타 선수와 감독이 더 많은 빛을 받고 그에 따라 더 많은 명예와 부를 획득하지만, 그 영광 뒤에 수많은 ‘세션맨’들이 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최근 소식을 들어보니,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축구협회와 재계약을 하는 과정에서, 꽤 오랫동안 정성을 들여 ‘코칭스태프’에 대한 조건도 흡족하게 마무리지었다고 한다. 무려 4개월 동안 진행된 협상 과정에서 미확인 루머와 비난도 없지 않았는데, 박항서 감독은 자신과 함께 활동해왔고 또 앞으로 활동하게 될 코칭스태프의 대우까지 꼼꼼히 챙겼다고 하니 스포츠에서 말하는 ‘원 팀’은 바로 이런 결의에서부터 시작한다.
더 중요한 것은, 지도자 개인의 덕목에 의존하는 것을 넘어서서, 스포츠계 전체가 ‘모두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이를테면 대한체육회가 역점 사업으로 진행하고 있는 ‘한국 체육을 빛낸 100인’이 있다. 2020년 7월이면 대한체육회 창립 100주년이 된다. 이를 기념하여 근현대 체육의 역사를 빛낸 100인을 다양한 방식으로 선정하는 사업이다. 탁월한 경기력을 보인 선수들, 헌신적이고 창의적인 결실을 맺은 지도자와 심판들, 행정·외교·홍보·연구 등 다양한 분야에서 대한민국의 스포츠 발전에 이바지한 100인을 엄선한다.
과거에도 일부 단체나 언론에서 이러한 선정 작업이 있었으나 어떤 경우는 ‘인기 투표’에 가까웠고, 또 어떤 경우는 그 ‘업계의 영향력’에 따른 것이라서 객관성이나 엄밀성이 현저히 떨어졌다. 무엇보다 스포츠의 특성상 ‘도전과 영광’이라는 스토리텔링이 압도하기 마련인데, 이 점을 지나치게 중시하게 되면, ‘도전’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이탈하였거나 그 트랙을 거부한 사람들은 삭제하게 되고 심지어는 ‘영광’의 과정에 묵묵히 조력한 사람마저 망각해 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결국 각 시대의 대중적 스타를 나열하는 방식이 되곤 하였는데, 이번의 대한체육회 선정 작업은, 그 분야를 다양하게 나누고, 그 선정 과정을 단계별로 수렴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보다 다양하고 보다 깊이 있는 결실을 맺기를 기대한다. 그 흔한 이벤트나 인기 투표가 아니라 ‘창립100주년 기념사업’ 아닌가.
누군가를 선정하는 것은 누군가를 배제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 선정(동시에 배제) 작업에는 지난 시대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관점이 개입하기 마련이고 그 관점에는 또한 복잡한 문화정치적 시선이 작동하기 마련이다. 이 시선들이 ‘순수’라는 이름 아래 은폐되기보다는 오히려 정확하게 드러나는 것이 중요하다. 2021년 개관을 목표로 진행되고 있는 ‘국립체육박물관’은 바로 그러한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한다.
문체부가 국민체육공단을 통하여 현 서울올림픽기념관 인근에 건립 중인 ‘국립체육박물관’은 총 사업비 300억원가량이 투입되는 대규모 사업이다. 스포츠역사관, 스포츠유물전시관, 스포츠체험관 등이 들어서는 이 박물관은 애초 2019년 개관할 예정이었으나 여러 이유로 연기되어 현재는 2022년 개관을 목표로 하고 있다. 태릉선수촌 내 ‘한국체육박물관’이 있으나 예산 등의 이유로 1명의 학예사가 일하는 정도이고, 심지어 국민에게 개방되는 박물관임에도 공휴일이나 주말에는 ‘휴관’하는 형편이라서, 장차 신설될 ‘국립’ 박물관에 거는 기대가 크다.
중요한 것은 그 전시의 철학과 방향이다. 개별 단체나 개인의 사설 박물관이 아니고 모름지기 ‘국립’으로 짓고 운영하는 ‘박물관’이니만치 ‘기승전영광’의 도식적인 스토리텔링에서 벗어나 훨씬 더 포괄적이고 복합적인 관점이 필요하다. 역사를 반듯하게 솔질하게 되면 무심코 생략하거나 일부러 은폐해버리는 사건과 인물과 사태들이 발생하게 된다. 더욱이 어느 분야든 ‘국립’이란 이름의 ‘박물관’은 특정 기관의 홍보 공간이 아니다. 수집하고 연구하고 전시하고 사회화하는 공간이다.
인간의 ‘몸’이 다양하게 작동하는 스포츠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한국 스포츠 100년 역사는 반드시 영광만 있었던 것이 아니며 스타만 존재했던 게 아니다. 특정한 사건을 역사적·정치적·문화적 관점에서 복합적으로 판별할 수도 있어야 한다. 때로는, 불편하더라도, 역사를 거슬러 솔질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몸’으로 살아낸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하고 복합적인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고 복원할 수 있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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