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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이니까 6년 전의 일이다. 한화는 한국시리즈 우승 10회에 빛나는 김응용 감독을 새 감독으로 영입했다. 기대가 컸지만 앞선 겨울 에이스 류현진이 메이저리그로 떠난 한화의 출발은 썩 좋지 않았다. 4월의 날씨는 25도를 오르내리며 초여름을 방불케 했지만 한화 더그아웃은 냉기가 가득했다. 시즌 시작 뒤 연패가 9개까지 쌓였다. 개막 후 10번째 경기를 앞두고 야구장에 나타난 선수들의 머리는 봄볕 속에 더욱 새파랗게 빛났다. ‘삭발’이었다. 외야수 정현석은 아예 눈썹까지 박박 밀었다. 의지와 각오를 잔뜩 드러냈지만, 야구는, 세상의 모든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의지와 각오만으로 풀리지 않는다. 지긋지긋한 연패가 끊어진 것은 4패나 더 이어진 뒤였다.

13연패를 끊던 날, 김응용 감독은 감독 통산 1477승째를 따냈다. 천 번이 넘는 승리와 그만큼의 패배를 당한 노장도 지독한 연패 탈출을 기뻐하는 팬들의 환호 속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김 감독은 “눈물이 아니었다”고 짐짓 무심한 표정을 지었지만 “오늘 경기 평생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 모습을 바라본 한화의 한 팬은 울먹이며 외쳤다. “매일 져도 계속 응원할 거예요.”

연패 탈출은 ‘삭발’의 힘이었을까. 스포츠심리학자들은 ‘삭발 효과’를 두고 “팀 응집력이 높아진 결과”라고 설명한다. 단체경기의 중요한 경기력 요소 중 하나다. 일반 사회조직에도 적용된다. 응집력(cohesion)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특정 목표를 향해 팀이 뭉치는 ‘과제 응집력’과 선수단 내부의 관계를 강화하는 ‘사회 응집력’이다. 삭발은 후자인 사회 응집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스포츠심리학의 여러 연구들은 구미권 스포츠와 동아시아 스포츠의 응집력 차이가 뚜렷함을 드러낸다. 구미권 스포츠는 과제 응집력이 강하게 드러나지만 동아시아 스포츠, 특히 한국 스포츠는 사회 응집력이 뚜렷하다. ‘우승을 위해 나아가자’는 메시지보다 ‘함께 죽자’는 메시지가 더 강한 힘을 얻는 방식이다. 경기에서 지면 더 강한 단체훈련을 하고, 함께 삭발을 하며 스스로를 괴롭힘으로써 ‘우리는 하나’라는 메시지를 강화해 왔다.

두산 베어스 선수들이 10월26일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2019 신한은행 마이카 포스트시즌 한국시리즈 4차전 키움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 승리,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후 셀카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두산베어스 선수단 제공

2019년의 야구는 조금 달랐다. 한국시리즈 우승팀 두산은 우승 확정 순간 주장 오재원을 중심으로 마운드에 모였다. 휴대전화를 들고 ‘셀카’를 찍었다. 한국시리즈 내내 이어진 ‘셀카 세리머니’의 완성판이었다.

두산은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훈련 중 젊은 선수들로부터 ‘세리머니’를 공모했다. 한 손을 뻗어 셀카를 찍는 듯한 포즈를 취하는 ‘셀카 세리머니’가 당첨됐다. 시리즈를 치르는 동안 안타를 때리고, 타점을 올리면 더그아웃을 향해 ‘셀카 포즈’를 취했다. 더그아웃에서 선수들이 같은 포즈로 화답했다. 정규시즌에도 세리머니는 화제였고, 힘을 냈다. LG는 두 손을 흔드는 ‘안녕 세리머니’를 했고, 키움은 이니셜 K를 손가락으로 표시하는 ‘K 세리머니’를 했다.

‘세리머니’는 사회 응집력보다는 과제 응집력을 강화시킨다. ‘우리는 하나’에 앞서 팀의 목표를 구체화한다. 팀 승리와 연결되는 안타와 타점 등이 세리머니로 연결된다. 세리머니를 연습하고, 머리에 그림으로써 해당 타석에서의 목표가 더욱 구체화되는 효과를 얻는다. 2019 한국 프로야구는 ‘세리머니의 야구’였다.

어쩌면 딱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삭발 야구’에서 ‘세리머니 야구’로의 변화다. 시대가 바뀌었고, 함께 고생함으로써 ‘우리는 하나’임을 확인하는 ‘삭발의 시대’ ‘극기훈련의 시대’는 2010년대와 함께 끝났다. 2020년대는 팀과 조직의 구체적 목표를 확인하고 이를 하나 된 동작으로 체현함으로써 응집력을 강화시키는 ‘세리머니의 시대’다. 그러니까, 정치에서도 ‘삭발’이라든가, ‘차라리 다 함께 죽자’는 막연한 구호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우리 사회가 그렇게 변했음을 야구가 보여줬다.

<이용균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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