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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작은 나라를 다녀온 친구가 그곳에는 ‘연애 자격증’이라는 이상한 국가제도가 운영되고 있다고 전했다. 남아선호와 낮은 출산율 때문에 성비불균형이 심각해서라는데, 2030년엔 남성 100명 중 29명이 결혼을 못할 것이라는 전망치까지 있다고 하니 문제가 심각하긴 한 모양이다.
한때 이 나라도 일부일처 핵가족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가난하게 결혼해도 20년이면 내 집 마련이 가능했다. 오랜 내전이 끝난후 시작된 산업화 시대에 인프라 재건과 해외수출 호조 덕이었다. 그런 기적의 시기는 1990년대 말에 ‘쫑’이 났다.
내전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이곳 국민들의 성품은 늘 초조한 편이었다. 그래서 성비불균형에 경제위기까지 겹칠 경우 벌어질 사회적 혼란을 심각하게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급기야 ‘연애 자격증’ 도입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능력 있는 남성만 연애와 결혼, 출산을 할 수 있도록 허가함으로써 사회적인 혼란을 최소화한다는 게 골자였다. 여론이 처음부터 개인을 가축 취급하는 국가자격증에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국가가 정한 사회적 아젠다에 동원되는 데 길들여진 국민들은 정부가 언론을 동원해 ‘이러다간 나라 망한다’며 위기론을 펴기 시작하자 결국 찬성으로 돌아섰다. 어떤 학자는 방송에서 “자연에서 능력 있는 수컷이 암컷 여럿을 거느리는 것은 강력한 유전자를 번성하게 하려는 자연의 섭리”라며 사이비 이론을 떠벌렸는데, 권위에 눈이 먼 사람들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집 밖 자살 비율_경향DB
자격증 도입에 따라 결혼적령기 남성들은 등급심사를 받았는데 큰 심리적 저항은 없었다고 한다. 학교에서 성적순으로 줄세우는 것을 국가 차원으로 조금 확대한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남성들은 경제·사회적 상태를 엄밀하게 쪼갠 자격조항에 따라 등급이 매겨졌다. 시민단체들은 “사실상 카스트 제도”라며 비판 목소리를 높였지만, 대부분 남성들은 조용했다. 불만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순간 ‘루저충’ ‘분열충’ 같은 막돼먹은 비난을 감수해야 할 터였다. 내면화된 수치심 속에 남성들은 흩어져 침묵했다.
연애 자격 최상위 등급은 물론 이 나라의 경제귀족인 10대 재벌 그룹의 청년들이었다. 하지만 외부 충격에 취약한 경제 탓에 언제든 등급이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었다. 그 다음 등급은 준재벌, 그 다음은 상위 1%의 고소득층, 얼추 이런 식이었는데 아주 세밀하게 단위를 쪼개놓은 평가지표를 보노라면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경제능력 이외의 것은 거의 장신구 수준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건 이 나라 사람들의 배금주의 때문인지 미심쩍었다.
이 ‘연애 자격증’을 발급받은 남성들은 성적으로 호감 가는 여성을 만나면 빽빽하게 자랑스러운 내용들을 적은 서류를 내밀었다고 한다. 여자를 유혹할 때 ‘이번에 대기업 정규직 합격했다’며 귀엣말을 달콤하게 속삭이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물론 자격 등급을 뻥튀기하거나 심지어 문서를 위조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따로 규율하지 않아도 귀신같이 ‘자정’이 이뤄졌다. 다들 서로의 등급을 면밀하게 따지고 감시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연애 자격증’을 얻지 못한 남성들이었다. 재벌만 살찌우는 정부의 정책 때문에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청년들이 대부분이었다. 사랑하고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은 매우 큰 고통이었다. 그러나 능력주의 신화에 사로잡힌 비정한 사회는 이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이 나라를 떠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어떤 남자들은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 여자들을 ‘된장녀’ ‘김치녀’라고 부르며 미워했다. 정부와 재벌을 비판하느니 그 편이 더 쉽고 안전했기 때문이다.
그런 나라가 세상에 어딨냐고 기가 막힌 나는 친구에게 물었다. 친구는 웃으며 “다 ‘뻥’이야”라고 말했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최민영 | 미디어기획팀 m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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