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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경주에서 전략적으로 투입되는 ‘페이스메이커’가 있다. 이들의 결승점은 42.195㎞ 지점이 아니다. 대략 30㎞이다. 여기까지 열심히 뛰어 다른 선수들의 페이스를 흩트려 놓으면 자신의 역할을 다한 거다. 마라톤, 사이클, 수영 같은 기록경기에서 ‘오버페이스’는 금물이다. 세계신기록을 갖고 있는 슈퍼스타도 오버페이스를 하면 제 실력을 내기 힘들다. 그러다보니 상대로부터 오버페이스를 이끌어내는 것은 주요한 작전 중 하나다. 페이스메이커는 자신을 위해 뛰는 선수가 아니다. 자신을 죽여 팀의 다른 선수를 살린다.

17일 폐막되는 패럴림픽을 끝으로 평창 동계올림픽이 모두 막을 내린다. 평창 동계올림픽은 스포츠를 넘어선 많은 질문을 한국 사회에 던졌다. 그중 하나가 ‘페이스메이커’ 논란이다. 이승훈 선수가 금메달을 딴 매스스타트에서 후배인 정재원 선수가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한 것은 ‘정당하지 않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유시민 작가는 “매스스타트는 개인경기인데 (정 선수가 페이스메이커를 해 희생하는 것은) 올림픽 헌장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촛불혁명 이후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최고의 화두는 ‘공정’이다. 모든 선수에게 똑같은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공정’은 올림픽 내내 불거졌다.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이 그랬고,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팀추월 경기가 그랬다. 스포츠를 통해 터져나온 공정에 대한 열망은 어느 때보다 강했다. 그만큼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불공정’에 이골이 나 있었다는 말도 된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공정한 자유경쟁은 언제나 선이 될 수 있을까. 싫든 좋든 현실적으로 우리는 ‘팀코리아’의 멤버다. 다른 팀과 경쟁을 벌여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팀플레이 없는 자유경쟁은 우리끼리 싸우다 모두를 패배자로 만들 수도 있다. 실제 여자 쇼트트랙 1000m 결승에서는 우리 선수끼리 부딪쳐 모두 탈락했다.

이 딜레마는 스포츠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현대중공업 등 빅3의 침몰 이면에는 우리 업체끼리의 제 살 깎아먹는 수주경쟁이 있었다. “글로벌 빅3가 한국 기업이라 가격결정권을 우리가 쥐고 있었어요. 조금만 더 전략적으로 접근했으면 모두 윈윈했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끼리 싸웠어요. 차라리 다른 나라가 가져갔으면 가져갔지 경쟁사는 못 주겠다는 심리가 있었어요.”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하면서 하늘만 바라봤다. 똑같은 얘기를 건설업계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2010년 초반 찾아왔던 해외건설 호황기에도 우리 건설사들끼리 플랜트 경쟁을 벌이다 저가수주를 떠안았다.

페이스메이커를 ‘불공정하다’고 보는 가장 큰 이유는 보상체계에 대한 불만 때문이다. 기껏 희생해 누군가를 승자로 만들어줬더니 승자가 그 고마움도 모르고 모두 독식해버리더라는 것이다. 재벌들이 대표적이다. 언젠가 만났던 고위 공무원은 “삼성전자가 1983년 반도체 사업을 하려 할 때 범정부 차원에서 수원 땅 매입과 반도체 설비 수입을 도왔고, 초기 반도체 기술 개발도 지원해줬다”며 “반드시 잘되어서 국민들을 먹여살려달라는 뜻이었던 만큼 삼성은 국민들의 고마움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현대차, SK, 롯데 등 다른 재벌도 마찬가지다. 정부의 강력한 유치산업보호정책과 시민들의 국산품 애용, 중소기업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의 신화는 없었다. 강남도 나홀로 부를 이룬 게 아니다. 강북과 지방이 낸 세금이 없었다면 1980년대 중반 강남 개발은 힘들었다.

공동체를 위해서 누군가는 페이스메이커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희생이 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페이스메이커를 자처할 사람이 없다. 강요하면 폭력이 된다. 같은 전략을 썼음에도 ‘팀네덜란드’에서는 페이스메이커 논란이 없었다. ‘특정 선수 밀어주기’ 논란이 페이스메이커의 존재, 그 자체에 맞춰져서는 안되는 이유다.

<경제부 | 박병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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