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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15일 포항 북구 흥해에서 진도 5.4 지진이 발생했다. 세상사 ‘절대’라는 건 없다지만 설마설마했다. 낯익은 고향 도로, 밤낮으로 내달렸던 골목길이 산산이 부서졌다. 고향집은 진앙 반대쪽이라 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늙은 부모는 “야야, 내 평생 여서(여기서) 이런 난리는 처음 본다”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어떻게든 고향 안부라도 듣기 위해 행정안전부에서 일하는 선배를 찾았다. 두툼한 외투 한 벌만 급히 챙겨 포항행 KTX를 탄 선배나 속만 타들어가는 나나 얼마를 더 뒤척여야 낯선 공포에서 헤어날지 가늠조차 어려웠다. 좀 수습됐나요, 이재민들은 괜찮나요. 미안한 질문과 지친 답변이 꽤 오래 이어졌다. 이재민 대피, 수능 연기, 자원봉사자 배정, 특별재난구역 선포….

겨우 진정 국면에 들어섰지만 선배는 ‘외로운 싸움’이라고 했다. “땅속만 갈라진 게 아니라 사람들 마음속 단층대도 갈라졌다”면서. 실제 사회관계망서비스에 온갖 비난과 억측이 떠돌았다. ‘포항 지진’이 아닌 ‘흥해 지진’이라 불러야 한다, 잘사는 도시니 알아서들 하겠지, 심지어 ‘그’ 대통령을 배출한 지역이라는 말도 들린다. 하나같이 포항 지진을 ‘그들만의 재난’으로 가둔 이유가 되고 있었다. ‘이념 재해’까지 감당해야 하는 포항은 지금 너무나 아프다.

대통령 출신지? 포항이 그 시절 특혜를 받았었나. 포스코 인수·합병, 자원외교는 포항엔 차라리 재앙이었다. ‘형님 예산’도 포항 시민 몫이 아니었다. 4세대 방사광가속기, 영일만 신항을 혜택이라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민주정부가 구상한 사업이다. 그렇다고 ‘그’ 대통령과 포항이 끈끈하기라도 했나. ‘그’ 대통령은 성금 500만원을 냈다고 한다. 딱 500만원어치 애정이다. ‘그’ 대통령이 자란 흥해 덕실마을 기념관은 사람들로 북적였던 때가 손에 꼽을 정도다.

좌익세력 때문? 일부에서 이념 문제를 들고나온다. 이런 분위기에 용기라도 얻었는지 보수정당은 이재민 대피소 부근에 ‘내년 정부예산은 복지 퍼주기’라는 플래카드를 버젓이 걸어놨다. 박정희 시대, 3당 합당,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거치는 동안 포항은 정경유착과 콘크리트 보수의 대명사로 불렸다. 그러나 지난해 촛불집회 이후 포항 시민들은 새로운 도시의 주체로 스스로를 호명했다. 19대 대선 당시 자유한국당 후보는 포항에서 과반에 실패했다.

잘사는 지역? 경제산업메카니 알아서 복구하라는 말이다. 포스코가 포항의 든든한 방패인 건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정치에 휘둘리며 휘청이는 사이 철강경기까지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1000명도 넘는 공단 노동자들은 새 일자리를 찾아 다른 도시로 떠나야 했다. IMF 구제금융 때도 불황을 모르던 오거리 중앙상가엔 빈 가게마다 임대 플래카드만 나부낀다. 재난의 상처를 한 지역의 문제로 고립시킬 때 어떤 고통을 겪는지 쌍용차, 용산, 밀양, 강정마을에서 이미 보지 않았나.

지진과 정치의 ‘이상결합’을 토로하다 선배는 다시 포항행 KTX에 올랐다. 이번엔 형산강을 가봐야겠다고 했다.

1500도가 넘는 용광로 쇳물을 펄펄 끓으며 받아내던 강, 3교대 자전거로 오가는 출선공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하던 강. 죽도시장 비린내와 만날 때면 반짝이는 생선 비늘로 돌아오던 그 강. 이맘때면 고향집에선 ㎏당 2만원쯤 하는 삶은 문어 2~3마리를 택배로 보냈다. 올해는 “우짜노 딸, 올해는 작년 절반(크기)도 안되는 게 ㎏에 4만~5만원 하네. 지진 땜에 죽도시장에 제대로 된 게 없다”고 미안해하며 엄마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문어 다리 하나씩 잘라 냉동실에 넣어야하는데 상자 안 얼음이 녹을 때까지 가위를 들지 못했다. 엄마는 형산강 로터리를 건너오며 얼마나 긴 한숨을 내쉬었을까.

이제 동강 난 포항의 아픈 시절까지 감싸안고 흘러야 할 강. 그 강 한 줄기를 빌려 오랜 고향 안부를 묻는다. 형산강은 잘 있나요.

<정치부 구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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