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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동계올림픽에 맞춰 여러 미술 행사도 막을 열었다. 국내외 유명 작가들이 여러 작품을 출품했다. 그 집결지 중 한 곳이 강원국제비엔날레가 열리는 강릉녹색도시체험센터다. 강릉 아이스아레나와 평창올림픽플라자에도 대형 설치 작품이 들어섰다. 인터랙티브 미디어 아트 위주의 ‘평창·피스 오버 윈도우’(平窓·peace over window)전도 열리고 있다.

미술 작품에 금·은·동을 매기는 건 가당치 않으나, 화제작은 꼽을 수 있다. 조각가 김지현이 2013년 평창 올림픽 유치를 기념하는 비엔날레에 낸 ‘총알맨’이다. 원작은 2008년 제작했다. 세상은 선정적인 이유로 이 작품에 주목했다. 프레스센터 주변 알펜시아 리조트의 이 작품을 보고 호기심을 느낀 일본 언론이 먼저 보도했다. 언뜻 남근을 떠올리게 하는 형상은 일본에 이어 한국 온라인에도 화제가 됐다. 외설이니 하는 말들도 나왔는데, 김지현의 말대로 작품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작품에 대한 미적 판단은 수용자의 몫으로 남겨둬야 할 것 같다. 이 글에선 ‘현대인의 욕망과 그 껍데기’를 형상화한 작품이란 작가의 말만 전한다.

2013년 평창 비엔날레 당시 알펜시아 리조트에 설치한 ‘총알맨’(원작은 2008). 김지현 제공

김지현과 인터뷰를 하고 포트폴리오를 보면서 ‘화제’를 잣대로 재단할 작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포트폴리오에서 더 눈길이 가고, 더 생각을 하게 만든 건 김지현이 2017년 8~9월 ‘녹·색·공·조’전에 내놓은 동명의 ‘녹색공조’와 ‘녹색향수’ 두 설치 작품이다. ‘녹색향수’에서 철제 탑에 오른 이명박은 긴 녹색 혀를 녹색광장에 드리운다. 이명박의 긴 혀는 그로테스크하다. 녹색 토사물을 쏟아내는 이명박을 발포우레탄으로 재현한 ‘녹색공조’도 추하다. 김지현의 두 작품을 보며 “추한 현실 속에서 발버둥치는 인간이 창작하는 미술은 추한 것이 당연하다”(서경식), “부패한 사회에서, 예술이 만약 진실하다면, 예술은 부패를 반영해야 한다”(에른스트 피셔)는 말이 떠올랐다.

이른바 ‘이명박근혜’ 9년을 거치면서 그 추하고 부패한 현실을 비판하는 작품은 많이 나왔다. 여러 작가들이 글로, 그림으로, 설치미술로, 퍼포먼스로 그 9년을, 그 정권을, 두 사람을 고발했다.

김지현의 작품이 새삼스러운 건 그는 한발 더 나아가 ‘자기비판’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김지현은 ‘녹색공조’의 녹색 토사물을 쏟아내는 이명박 흉상 맞은편에 자신의 얼굴을 빚어 넣었다. 이명박에 공조한 이는 결국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는 점을 반성적으로 성찰한 것이다. ‘녹색향수’ 녹색 광장에 쓰러진 이의 손엔 ‘유토피아’라고 적힌 종이가 들려 있다. ‘테이블 위의 미사여구’(2016)에서 화려한 수사로 유토피아를 보여주겠다고 현혹하는 남북한 위정자들의 두상 사이에 자신의 두상도 넣었는데 김지현은 “기득권을 지키려는 알량함으로 그릇된 현실과 여전히 무의식적으로 공모하는 자아에 대한 조소”를 담으려 했다고 말한다.

지금 정치사회나 문화예술계의 언어와 표현 양식은 첨예할 뿐 자기비판과 고백, 성찰의 작업은 보기 힘들다. 잇단 성폭력 파문과 설화에서 “괴물과 싸우면서 괴물이 된” 듯한 모습도 더러 목격한다. 분명한 잘못과 오류를 지적해도 ‘~라면 사과’ ‘~라면 유감’이라는 가정법이 따라붙는다. 대중의 비판을 두고 특정 진영과 세력의 음모로 치부하는 일도 나온다.

자기비판과 성찰의 결여는 우리를 지배하는 질서나 삶의 방식과도 이어진다. 성찰 없는 사회에서는 부자로 만들어주겠다는 허황된 약속이나 그 누구의 자식이라는 허명은 언제든지 다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다.

지금도 돈, 직업, 학력, 위계, 착취의 문제들은 촛불에도 쉽사리 바뀌지 않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그런 것들을 욕망하고 있다. ‘우리’에게 ‘공조’의 혐의는 없는가? ‘자기비판을 통한 작업’을 수행하는 김지현의 작품을 다시 들여본 것도 이런 물음 때문이다.

<문화부 | 김종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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