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정제혁 | 사회부
대검찰청이 지난 22일 발표한 ‘통합진보당 사태에 대한 검찰 입장’(이하 입장)은 검찰이 자신의 사회적 위상과 역할을 어떻게 매김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문서이다. ‘입장’에서 검찰은 정치·사회적 갈등의 ‘최종 해결자’ 역할을 자임하는 것처럼 보인다.
통합진보당에 대한 수사의 배경을 설명한 ‘입장’의 첫 단락은 세 문장으로 이뤄져 있다. 먼저 “통합진보당은 지난 4·11 총선에서 민주적인 비례대표 후보자 선출방식을 통하여 높은 정당득표율을 이끌어냈으나, 최근 불거진 ‘비례대표 경선 과정에서의 총체적인 부정 의혹’으로 인하여 국민적인 실망감이 커지고 있다”고 전제한다.
이어 “ ‘부정경선 의혹’을 해결하여야 할 통합진보당은 당내 각 정파의 첨예한 대립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중앙위원회 폭력사태’는 국민들의 걱정과 우려를 넘어 공분을 초래하게 되었다”고 진단한다. 끝으로 “이미 총선 과정에서 문제가 되었던 ‘야권 단일화 관련 여론조작 의혹’, 연일 폭로되는 ‘핵심 인사들의 각종 금품 관련 의혹’ 등으로 인해 통합진보당 사태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규정한다.
임정혁 대검찰청 공안부장 통합진보당 압수수색 브리핑 ㅣ 출처:경향DB
‘국민적인 실망감이 커지고 있다 → 국민들의 걱정과 우려를 넘어 공분을 초래하게 되었다 →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점층법적 서술에 이어 다음 단락에선 ‘이에 따라’로 시작하는, 통합진보당에 대한 수사와 압수수색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문장이 나온다. 요컨대, 국민적 공분을 일으킨 중대한 사안인 만큼 수사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 검찰의 논리다. 이것은 ‘법의 논리’보다 ‘정치논리’에 가깝다. 기실 특정 정당의 내홍을 놓고 검찰이 해결사를 자임하고 나선 것 자체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입장’을 보면 검찰이 정서적으로 다소 고양돼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여론의 순풍을 타고 ‘종북세력’을 손볼 호기를 만나 들떠 있는 느낌이랄까.
물론 ‘입장’에는 ‘종북세력’이라는 어휘는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공안검사들은 수사의 표적이 통합진보당 당권파, 이른바 ‘종북세력’임을 숨기지 않는다. ‘종북세력 척결’은 한상대 검찰총장의 지론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명박 대통령은 난데없이 ‘종북세력’의 문제를 언급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번 통합진보당 사건은 ‘절차적 정의’와 관련된 것이다. 설혹 당내 부정경선을 주도한 세력이 ‘종북주의’ 성향을 갖고 있더라도 달라질 건 없다. 이들이 처벌을 받아야 한다면 절차적 정의를 위반했기 때문이지 ‘종북주의’ 성향 때문이 아니다. ‘종북주의’ 문제는 정치적 경쟁의 장에서 투명하게 평가받을 일이다. 불필요한 이념적 투사는 진보를 한 단계 성숙시킬 수 있는 이번 사태를 꼬이게 만들 뿐이다. 이미 징후가 보인다. 검찰과 여권의 ‘종북세력 척결’ 프레임에 맞서 통합진보당 당권파는 ‘공안탄압에 맞선 대동단결’을 주장한다. 진보세력이 수십년간 절차적 정의를 유예하게 만든 익숙한 구도의 되풀이다.
'정치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설]강창희 19대 국회의장 후보 선출에 부쳐 (0) | 2012.06.01 |
---|---|
[사설]안철수, 논평 아닌 비전·철학 내놓을 때다 (0) | 2012.05.31 |
[기고]진보의 남용 (0) | 2012.05.29 |
[경향논단]넘치던 ‘복지 구호’ 다 어디 갔나 (1) | 2012.05.29 |
[기자메모]알권리 무시한 외교부의 ‘꼼수’ (0) | 2012.05.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