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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라는 건 그저 ‘재빠른 바보’일 뿐이다. 상상력이 없다. 행동을 할 수도 없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컴퓨터는 인간의 도구로만 남을 것이다.”

미국도서관협회가 1964년 최초의 영업용 컴퓨터 ‘유니박(UNIVAC)’에 대해 내놓은 성명이다. 빛의 속도로 달리는 지금 디지털 세상을 생각하면 실소(失笑)가 나온다. 그들이 50년 전 ‘재빠른 바보’라고 조롱한 그것 때문에 미국도서관협회는 종이 더미에 갇힌 ‘촌뜨기’의 상징쯤으로 역사에 남게 됐다.

“지금 우리 국민은 어떻습니까. 하루하루가 불안합니다. 국가의 성장이 국민 개개인 행복으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2012년 8월20일,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 수락연설) “국민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국가가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느끼십니까? 나의 어려움을 함께 걱정해주는 정부라고 생각하십니까?”(2012년 9월16일,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선 후보 수락연설)

지난 대선에 나선 두 유력 후보의 생각은 다르지 않았다. 국가경영을 위한 문제의식의 출발점은 ‘국민이 행복하지 않다’는 깨달음이었다. 대선 내내 ‘국민행복’(박 후보), ‘사람이 먼저’(문 후보)를 각각 선거 슬로건 첫머리에 둔 것은 그 때문이었다. ‘행복’과 ‘사람’은 이전과 다른 새로운 국가, 즉 ‘복지국가’에 대한 요구와 응답으로 여겨졌고, 복지를 ‘시대정신’으로 매김한 것이었다. 박 후보는 이듬해 대통령 취임사에서 “새로운 복지 패러다임으로 국민이 근심 없이 국가발전에 기여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최근 정치권의 무상보육·무상급식 ‘재원 논쟁’을 보노라면 미국도서관협회의 ‘청맹과니’ 같은 무지가 떠오른다. 아니 불과 2년 전 이해한 것을 스스로 부정한 것이니 ‘변심(變心)’이라 해야 더 적당하겠다. 아니면 그들의 말은 마음에도 없는 선거용 아첨에 불과할 터다.

이번 재정 논쟁에서 ‘복지’를 대하는 여권의 모습은 치졸하다. ‘찌질’하기 그지없다. ‘무상급식’은 공약이 아니니, ‘무상보육’만 하겠다고 한다. 박 후보 경제참모로 ‘박근혜의 대선’을 함께 만든 대통령 경제수석의 말이다. 국민이 행복한 복지에도 ‘내 꺼와 니 꺼’가 따로 있는 셈이다.

이처럼 여권에 ‘복지’는 ‘편’을 나눌 수 있는, 선거에 이기기 위해 필요하지만 거추장스러운 ‘그 무엇’쯤으로 보인다. 복지를 ‘시대의 뜻’으로 이해하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유럽 강국 프로이센의 미래의 토대를 놓은 ‘비스마르크의 복지’처럼 복지는 철학이자 미래란 것을 말이다. 비스마르크의 복지는 술자리에서 종종 그들이 “이 사회를 바꾼 것은 보수”라고 자랑하는 근거가 돼왔다.

[김용민의 그림마당] 2014년 11월11일 (출처 : 경향DB)


야당도 ‘졸렬’했다. ‘정쟁’으로 비칠 수 있는 ‘증세’를 무작정 요구할 게 아니었다. “복지 수준과 조세 부담에 대한 ‘국민대타협’을 추진하겠다”는 박근혜 후보 발언을 되돌려주며 증세가 가능할지 제대로 사회적 ‘총의’를 모아보자고 했어야 한다. 그게 진정 정부·여당을 코너로 모는 일이었다. 야당에도 복지란 ‘정치적 아젠다’ 이상의 의미는 아닌 듯 싶다.

물론 항변할지 모른다. 그땐 선거가 아니었느냐고. 민주주의의 비용인 ‘선거’라는 특수상황을 교정할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이다.

하지만 미국도서관협의의 무지만큼 큰 착각이다. 여야 모두 갈급한 표를 위해 공약했다면, 그건 단순한 포퓰리즘이 아니다. 이 시대 삶들이 요구하는 ‘시대정신’일 것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지난 20일 한국의 가계부채가 40~50대에 집중돼 있으며, 이들이 은퇴하는 10~20년 후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40·50대는 우리 사회 생산의 기지이자 허리다. 문제가 된 무상복지의 가장 큰 수혜층이기도 하다. 지금 복지는 이들 세대의 가처분소득을 늘려 다가올 위기에 대비하는 ‘미래 투자’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피해갈 수 있는 정치는 없다.

미국 경제학자 토드 부크홀츠는 “경제성장을 필요로 하는 국가들은 기아에 허덕이는 후진국들일 뿐이다. 선진공업국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경제성장이 아니라 합리적 분배와 건전한 사회기풍”(<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이라고 말했다.

지금 정부가 1960년대, 1970년대와 똑같은 ‘성장’을 다시 꺼낼 일은 아니다. ‘복지’를 시대정신으로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영원히 선거 때만 ‘재빠른 바보들’로 남을 것이다. 그들이 바보로 남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그들로 인해 우리 모두가 이 현기증 나게 힘겨운 시대에 ‘미아’들로 남게 될 것이란 우울한 예감이 문제다.


김광호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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