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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규항


ㆍ“체제 안의 대안 말하는 제도권 지식인들… 그건 대안이 아니다”

지식인이란 참 묘한 존재다. 지식인은 체제 안에서 길러지며 체제를 옹호하고 봉사하는 체제내적 엘리트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동시에 지식인은 바로 그 지식으로 체제를 비판하고 분석하며 심지어 극복을 시도하는 위험성을 가진다. 체제의 숙제는 그 위험성을 얼마나 통제하는가에 있다. 극우독재 시절엔 가두고 고문하는 방식으로 쉽게 통제했지만 정치적 민주화 이후 체제는 좀 더 세련된 방식을 사용하게 되었다. ‘체제를 위협하지 않는 진보지식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한형식은 바로 그 문제, 지식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방식과 구조를 파고든다.

 

사진 _ 권호욱 선임기자 biggun@kyunghyang.com


▲ 출판사 직원·학원 강사·부동산 중개·주택 관리… 그의 수많은 직업
하지만 생계를 해결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쓰는 사람도
지식을 만들고 유통시킬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김규항 = “출판사 직원, 고시학원 강사, 입시학원 강사, 개인 과외, 부동산 중개, 주택 관리, 번역, 연구용역 보조, 대필 등의 일을 하면서 생활해 왔으며, 식당, 카페를 운영하기도 했다.” 선생의 책 <맑스주의 역사강의> 저자 소개에 적힌 말입니다.(웃음)

한형식 = 특이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먹고살기 위해서 하는 일들일 뿐입니다. 지식을 만들고 유통시키는 사람들이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 자기 생계를 해결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쓰는 사람들도 지식을 만들고 책을 쓸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김규항 = 옛날에는 지역마다 평범하게 살아가면서 향토사학자 노릇하는 사람도 있고 요즘 말로 하면 일생 동안 인문학 공부를 하는 분들이 많았죠. 그게 사라졌다는 건 지적 활동과 삶이 분리되었다는 말일까요.

한형식 = 이론은 그 자체로 완결성이 있어서 무슨 문제든 논리적으로 해명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이론의 맹점이죠. 몸으로 다른 삶의 방식을 경험하고 호흡하지 않으면 이론은 현실과 유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김규항 = 선생이 활동하는 ‘세미나네트워크 새움’은 오랫동안 묵묵히 마르크스주의를 기반으로 한 연구 작업과 교육활동을 해왔습니다. 1990년대 이후 포스트주의를 내세우며 마르크스주의 폐기에 앞장섰던 연구자들이 2008년 자본주의 위기 이후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른 모습을 보이는 걸 보면 감회가 있을 듯합니다.

한형식 = 입장은 변할 수 있는데 그런 변화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 없다는 것, 그리고 언제나 자기 입장으로 대중을 계몽하고 지도하려는 태도가 문제라 생각합니다. 그분들은 자신의 입장이 일단 변하면 기존의 입장은 모조리 낡은 것이라 규정하곤 했지요. 유행을 만들고 자신들이 그 주인이 되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희한한 일들이 많이 생겼는데 칼 폴라니가 요즘 활동하는 경제학자인 줄 아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웃음)

김규항 = 진지하고 현명한 사람이라면 아는 인생과 세상에 대한 이치들을 프랑스 학자들이 만들어낸 어려운 말로 소개하면서 마치 세상에 없던 개념인 양 말하는 경박한 모습도 있었지요.

한형식 = 폐해가 아주 컸습니다.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던 진지한 청년이 갑자기 어려운 말로 글을 쓰고 그걸 인터넷에 올리는 게 의미있는 좌파활동인 것처럼 생각하는 모습을 보면 안쓰러웠죠.

김규항 = 그걸 비판하면 반지성주의라 반발하기도 했는데 반지성주의의 백미는 쉬운 걸 어렵게 말하는 기술이죠. 그들의 가장 큰 폐해는 역시 좌파 담론에서 노동과 계급을 지워버린 것이었습니다. 노동과 계급 말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건 깡통좌파겠지만 노동과 계급을 뺀 좌파는 어떤 의미에서도 좌파가 아닙니다.

한형식 = 덕 핸우드라는 학자가 간단하게 반박하더군요.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어떤 통계도 제시하지 않는다.” 좌파 쪽의 자료가 아니라 세계은행 같은 주류에서 쓰는 통계를 보더라도 노동자 계급은 사라지기는커녕 줄어들지도 않았지요.

김규항 = 심지어 그들 중 일부는 유럽에선 노동 계급 이야기를 하면 무시당한다는 거짓말까지 늘어놓곤 했죠. 유럽의 중학생들이 ‘자본주의 반대’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풍경은 요즘 텔레비전에서 종종 볼 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옛 기지촌 풍경입니다. 양키 흉내내며 세련된 체하는 가장 촌스러운 사람들.

한형식 = 기지촌 맞습니다. 사실 한국에서 유행한 포스트주의라는 게 유럽에서 바로 들어온 것도 아니고 미국이라는 확성기를 통해 몇 년의 시차를 두고 들어온 것입니다. 미국에서 주목받지 않은 유럽 담론이 들어온 일은 없습니다.

김규항 = 그런가 하면 미국에서 일반화한 담론이 한국에선 감쪽같이 없는 경우도 있지요. 이를테면 ‘신자유주의적 민주화(neoliberal democracy)’ 같은 경우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를 해명하는 데 결정적인 이론인데요.

한형식 = 유럽이 아닌 주변부 국가에서 신자유주의가 도입될 때 정치적 민주화라는 당근을 먼저 제공하여 민중이 겪는 고통과 저항을 다스린다는 이론이죠. 가설이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진행된 주변부 국가들에서 공통적으로 진행된 상황이라 미국에서만 해도 1980년대 후반부터 진보적인 학계를 넘어 보편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이론입니다.

김규항 = 한국에서 신자유주의가 본격화한 것은 1997년 IMF 이후 김대중 정권에서지만 정치적 민주화는 10여년 전에 이루어졌고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권에서 천천히 신자유주의화가 진행되었죠.

한형식 =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선 만델라의 집권으로 신자유주의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지요. 그 후 흑인들의 기대수명이 25년이나 줄었다니 그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습니다.

김규항 = 인종차별주의 보수세력과 만델라의 차이를 부각하면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을 차단하는 건 보수정치세력과 김대중 노무현 세력의 차이를 부각하면서 신자유주의를 차단하는 상황과 같습니다. 그 가장 중요한 역할을 이른바 진보지식인들이 하고 있지요.

한형식 = 그 진보지식인들이 활동하는 중요한 공간이 대학과 제도언론입니다. 그 바깥에서 노력과 고민들이 중요합니다. 그나저나 그들은 과거에 좌파였고 지금은 자유주의자들인데 자유주의 체제에서 자유주의가 어떻게 진보적일 수 있는지 매우 궁금합니다.(웃음) 같은 맥락에서 ‘신자유주의적 민주화’라는 개념이 한국에 없는 것도 의도적인 은폐라고 봅니다. 워낙 일반화된 이론이고 또 저희가 몇해 전에 진보적인 정치학자 몇분에게 그런 내용의 책을 번역 의뢰했다가 거절당한 경험도 있습니다. 자신들에게 불편한 내용이기 때문이겠지요.

김규항 = 그런 분들이 전가의 보도로 사용하는 말이 ‘대안이 뭐냐’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대안이라는 말을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안을 부정하기 위해 사용합니다.

한형식 = 대안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기존 체제와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인정하는 대안은 기존 체제 안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그건 대안이 아니죠.

김규항 = 신자유주의가 대중에게 가한 불안하고 시급한 심리 상태를 악용하는 야비한 전략이죠. 그들의 목적은 근본적이고 변화를 차단함으로써 자신들이 기득권을 유지하는 동시에 자신들이 여전히 진보의 최전선에 있게 보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한형식 = 현실적 개선의 의미를 부인하는 게 아니라 그것과 장기적 전망이나 급진적인 상상력이 얼마나 조화를 이루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하면 그들은 현실적인 개선은 쓸모없는 것처럼 말합니다. 교조에 빠져 있다고 비난합니다.

김규항 = 그 역시 극우독재 수십년 동안 대중에게 심어놓은 흑백논리의 경향을 악용하는 것이지요. 그들은 또한 함께 심겨진 반공주의 경향도 악용합니다. 자신들보다 왼쪽은 무엇이든 스탈린주의니 구좌파니 매도하죠.

한형식 = 마르크스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건 현실에서 출발하자는 것입니다. 현실은 다양하고 변화하기 때문에 어떤 경향을 마르크스주의로 정해놓고 비판하는 것 자체가 비마르크스주의적이죠. 또 하나 마르크스주의의 중요한 건 경제적 부분을 사회문제에서 주요한 부분으로 놓는 관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경제문제가 인간의 삶의 전부라 말한다고 비난합니다. 경제문제를 주요하게 본다는 건 그걸 전부로 본다는 게 아니라 민중이 겪는 고통이 경제적인 부분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김규항 = 그들이 아이 교육에서 ‘현실이 어쩔 수 없다’고 말할 때 그 현실도 경제문제죠.(웃음)

한형식 = 마르크스주의는 실제로 현실을 얼마나 바꿔내는가를 중요시합니다. 이명박을 그렇게 욕하고 비판했지만 결국 이명박 의도대로 안된 게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명박 반대운동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이겠지요.

김규항 = 이명박 정권은 지배계급 자체가 아니라 그 정치적 하수인이기 때문에 지배계급 자체를 타격하지 않고는 이명박을 타격하는 효과도 없을 수밖에요. ‘신자유주의 반대보다 이명박 반대가 시급하다’는 말은 매우 현실적으로 들리지만 실은 이명박을 반대하지 말자, 반대 시늉만 하자는 말입니다.

한형식 = 지배계급은 자신들에 대한 반대가 실제 위협인가 아닌가를 정확히 파악하고 위협이 아닌 반대는 오히려 대중이 그쪽으로 쏠리게 부추깁니다.

김규항 = 나꼼수는 기존의 진보는 낡았다, 에쿠스 타는 진보, 강남좌파가 필요하다는 식으로 말을 합니다. 전선을 지배계급과 민중에서 지배계급 내에서 보수세력과 자유주의세력의 싸움으로 이동시키는 건 지배계급을 위한 최선의 봉사죠. 나꼼수에 대한 일정한 탄압은 나꼼수가 지배계급을 위협해서가 아니라 위협하지 않는 걸 위협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형식 = 그런 이데올로기 전술은 전 세계적으로 비슷합니다. 젊은 세대들이 폼나 보이고 재미있고 안전한 저항만 저항으로 여기고 진지하고 고생스럽고 위험한 저항은 기피하는 빌미를 만들어서 저항의 힘 자체를 빼버리는 전략인 것이지요. 오바마가 동성결혼을 허용한 것도 그 일종이라 할 수 있죠. 실질적으로 경제정책 면에서 공화당 민주당이 하나로 수렴되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이야기인데 거짓 대립선을 만들어내 대중을 기만하는 것이죠. 심지어 미국에도 ‘부시 FTA는 나쁘고 오바마 FTA는 좋은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웃음)

김규항 = 그런 문제를 지적하고 비판하면 질문을 받습니다. ‘그분들이 정말 그렇게 이중적으로 사악한 사람들일까요’ 그러면 대답합니다. ‘아마 그렇지 않을 겁니다. 나름으론 최선의 현실적인 진보적 노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사람의 속마음은 자신조차 헷갈릴 때가 있고 그걸 재단하는 건 사회적 토론이 아니라 심령술이나 마법이지요.

한형식 = 지식인은 변절했다는 비난을 받으며 체제에 편입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자기도 모르게’ 편입됩니다. 스스로는 현실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고 믿는데 실은 체제에 봉사하고 있는 것이지요. 사회적으로 보면 체제에 대한 봉사와 기득권을 교환한 것이고요. 개인의 인격이 아니라 지식사회학의 관점에서 시스템을 보는 게 중요하죠.

김규항 = 시스템이 아니라 개인의 인격을 보게 함으로써 사회적 기만을 만들어냅니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그의 죽음 이전과 이후로 정반대로 나타납니다. 이명박을 당선시킬 만큼 실망스러운 대통령이 민주주의의 성자로 변하고 친노세력도 일제히 부활하죠. 이건 연애감정이지 정치의식은 아닙니다. 강퍅한 말로 들리겠지만 그걸 부추기고 조종하는 세력을 생각해야겠지요.

한형식 = 그런 상황에서 난무하는 단어가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다양하게 그리고 기만적인 의도로 쓰이는 말도 없습니다. 부시가 이라크 침공할 때도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했습니다. 민중이 스스로 권리를 주장하는 것도 민주주의죠. 그걸 구분 없이 쓰면 지배계급이 사용하는 민주주의로 흡수되는 건 필연적입니다.

김규항 = 많은 사람들과 함께 강의하고 공부하면서 어떤 조짐이 보입니까.

한형식 = 노동운동이나 진보정치가 어려움을 겪고 대중이 자유주의 세력의 기만에 휩쓸리는 경향도 거세지만 한편으론 다른 모색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희 회원들이 학생 위주에서 일반인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도 그런 변화겠지요. 자본론 세미나를 해도 책만 보는 학생들보다 일반인들의 이해도가 월등합니다. 자기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이야기니까요.(웃음)

김규항 = 저희도 고래정치학교를 하고 있지만 지식이 내 현실과 만날 때 생기는 에너지는 대단하지요. 지치고 불안한 사람들이 멘토니 대권주자니 제 욕심을 채우려 현혹하는 사람들에게 쓰는 시간을 진짜 삶의 무기를 챙기는 데 쓰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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