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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전 충남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1심 판결문 전문(114쪽)을 읽었다. 다섯 가지 키워드를 떠올렸다.

법리. ‘문제적 판결’이 나올 때, 법관들은 법리 뒤에 숨는다. 서울서부지법 형사11부(재판장 조병구 부장판사)에 묻는다. 법리에 따라 판단했는가? 재판부는 ‘위력은 존재했으나 행사되지 않았다’고 했다. 형법 303조 1항은 ‘업무, 고용, 기타 관계로 인해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사람에 대해 위력으로써 간음한 자’를 처벌토록 하고 있다. ‘위력으로써’라 했을 뿐, 위력의 존재와 행사를 구분한 바 없다. 대법원 판례도 다르지 않다.

성폭행 등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지난 14일 1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 청사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위력이 폭행·협박 등 다른 수단을 통해서만 발휘될 수 있다면 위력이 아니다. 존재 자체로 약자를 복종시키기에 위력이다. 물리력이 작용했다면 위력간음이 아니라 강간죄로 기소됐을 것이다. 백보 양보해, 존재와 행사를 구분하는 법리를 받아들인다 치자. 재판부는 “(러시아에서의) 간음 전 단계에서 피고인이 행한 신체접촉은 포옹한 행위뿐이고, 언어적으로는 외롭다고 안아달라고 말한 것뿐”이라며 위력행사가 아니라고 봤다. 하급자라면 상급자의 포옹쯤은 용인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게 법리인가.

질문.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형사사법의 원칙이다. 다만 피고인에게 물어볼 사항은 철저히 물어봐야 한다. 재판부는 안 전 지사에게 묻지 않았다. 왜 피해자의 폭로 직후 페이스북에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는 비서실 입장은 잘못’이라는 글을 올렸는지, 왜 검찰과 법원에선 입장을 바꿔 합의한 관계라고 했는지. 왜 업무용 휴대전화를 검찰에 제출하지 않았는지. 법정에서 신문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최소한 판결문에는 진지하게 질문한 흔적이 없다.

신화. 판결문은 ‘이상적 성폭력 피해자’의 자격을 예시한다. 피해를 입기 전에는 당당하고 분명하게 행동해야 한다(“고개를 떨구고 ‘아니요’라는 말을 중얼중얼거렸다는데, 피고인이 거절 의사를 인식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 어렵다” “미투 운동의 가치에 반한다고 언급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피해를 입은 뒤에는 취약해져야 한다. 한밤중 지인에게 연락해 울고불고하거나(“새벽 통화내역을 보면, 피해를 호소한 연락은 보이지 않는다”), 직장 업무도 포기해야(“사건 발생 직후 피고인이 좋아하는 순두부집을 물색하려 애쓴 점”) 한다. 재판부는 가공의 피해자상을 설정한 뒤 김지은씨가 여기에 들어맞지 않아 믿을 수 없다고 한다. ‘피해자다움’이란 신화에 매몰된 결과다.

오남용. 재판부는 피해자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만큼 성숙한 사람이라는 점을 무죄 근거로 삼았다. 개념의 오용이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권리주체가 행사해야 하는 게 아니라, 타인이 존중하고 사회가 보장해야 하는 권리다. 원치 않는 성관계를 ‘맺지 않을’ 권리를 넘어 ‘요구받지 않을’ 권리까지 포괄한다. 재판부는 가장 명료해야 할 형사판결문에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개념어를 끌어들였다. 그것도 25차례나 남용했다.

내재적 접근. “피고인이 ‘미안하다’라고 말하고 문자를 보낸 취지는,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저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도지사와 비서라는 지위와 20살 이상 나이 차에서 오는 죄책감에 따른 사과라고 볼 측면도 없지 않다.” “피해자는 차량 탑승 시 피고인 옆 좌석에 앉도록 지시받았다고 진술했는데, 거리를 가깝게 함으로써 피해자 위상을 격상시키는 조치로 볼 수 있다.” 이쯤 되면 법관에게 허용되는 자유로운 심증 형성 차원을 넘어 피고인에 빙의한 수준 아닌가.

재판부는 ‘노 민스 노’(No means No·거부해도 성관계하면 강간) 룰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이 법이 있었다면 재판부가 피해자 손을 들어줬을까. 판결문에 드러난 젠더감수성에 비춰보면 그랬을 가능성은 낮다. 재판부는 고민과 학습이 부족했고, 관성적으로 판단했다. 입법 탓은 책임 회피다.

시민은 법원에 혁명적 상상력을 기대하지 않는다. 상식적 판단을 바랄 뿐이다. 지난 18일 ‘성폭력·성차별 끝장 집회’에서 분노한 여성들을 만났다. “직장에서 상사들의 성폭력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데, 법원은 세상에 그런 일이 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판결한 거죠.”(윤모씨·37·프리랜서) “위력은 존재하나 행사되지 않았다고요? 말장난 아닌가요?”(문지영씨·34·회사원)

미국 법학자 프레드 로델은 <저주받으리라, 너희 법률가들이여!>에서 말했다. “부족 시대에는 주술사가 있었다. 중세에는 성직자가 있었다. 오늘날에는 법률가가 있다. 어느 시대에나, 기술적 수법에 뻔뻔하고 그럴듯한 말장난을 첨가해, 인간 사회의 우두머리로 군림하던 영특한 무리들이 있었다.”

<김민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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