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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에 건설국장이라는 자리가 있다. 대법관도 바라보는 출세코스다. 실제로 건설국장을 거친 대법관이 부지기수다. 사법행정권 남용에 관여된 고영한 전 대법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변호인이던 차한성 전 대법관, 양승태 대법원에서 진보라던 이상훈 전 대법관 등이다. 이들의 업무는 ‘건축·토목공사의 설계, 전기·기계 등 설비공사의 설계 등’이라고 대법원 규칙에 적혀 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누구도 건축이나 토목을 알지 못한다. 이들이 실제로는 무슨 일을 했는지는 의문이다. 다만 대법관 제청권을 쥔 대법원장을 위해 공식·비공식 업무를 추진하고 수행한 것은 확실하다. 건설국장은 2005년 사법시설국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결국 폐지된다.

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김선수·노정희·이동원 대법관 취임식에서 김명수 대법원장(가운데)이 신임 대법관들과 함께 입장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건설국장의 애매한 위치와 성격, 의혹들은 2009년 만들어진 전산정보관리국장(전정국장)으로 이어진다. 판사들은 “이 자리에 왜 간단한 전산시스템도 이해하지 못하는 판사가 앉아있는지 모르겠다. 양형실장과 함께 업무가 불분명한 대표적인 자리다. 양승태 대법원 사법행정권 남용에 전정국장과 양형실장이 개입된 것이 우연만은 아닐 것”이라고 했다. 지적대로 많은 의혹과 불법이 여기에서 나왔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하드디스크 디가우징, 임종헌 전 차장 이메일 기록 삭제, 법원 내 학술모임 중복가입 금지 등이다. 전정국장의 면면을 보면, 초대 이정석 다음 최창영 국장은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했다. 그다음 이영훈 국장은 사법행정권 남용 수사 대상이다. 현직 정재헌 국장은 부실조사로 비난받는 사법행정권 남용 특별조사단원이다.

전산정보관리국이 법원행정처 퇴직자 부인이 설립한 회사에 10년 동안 243억원 규모의 입찰 특혜를 줬다는 의혹이 최근 제기됐다. 이 문제의 책임자인 정 전산정보관리국장은 김명수 대법원장 인사청문회를 준비한 대법원장의 복심이다. 정 국장은 경향신문 취재 과정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사실과 다른 데이터를 제시했다. 오스트리아산 실물화상기가 전국 법원에 353대라고 했지만 취재진이 확인한 것만 549대였다. 구입가격도 270만~370만원이 아니라 500만원에서 시작했다. 누군가 조작된 데이터를 정 국장에게 주면서 현직 법관인 그와 언론사를 시험했지만 대법원은 지금까지도 사태를 수습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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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이 보도 이후 내놓은 해명자료는 문제해결 능력이 없음을 드러냈다. 사실 대법원은 가족을 앞세워 회사를 세운 전직 공무원과 입찰을 담당한 법원행정처 공무원이 연락을 주고받으며 은폐를 시도한 정황을 파악했다. 그런데도 문제를 확인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 회사는 유지관리 사업까지 하도급 형태로 맡아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전체 인력의 12%만을 원청업체에 대면서 사업비의 30%를 가져갔다. 이 사업을 수주한 키맨이 누구인지 의심케 하는 정황이지만 이 역시도 대법원은 모른 체했다. 대법원이 내놓은 나머지 해명도 대부분 손쉽게 반박이 가능한 것들이다.

유럽과 미국의 대형 병원 수술실에서나 쓰는 실물화상기 구입이 불가피했다는 해명도 그렇다. 대법원은 오스트리아산을 대신해 미국산을 사들일 계획이었다. 서류가 실물화상기 다리에 걸려 불편하다는 이유다. 수십억원의 세금을 다시 써야 할 이유도 아니거니와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런 실물화상기를 사느라 20억원 넘게 낭비한 담당자와 납품한 회사를 고발해야 맞다. 그렇지 못하는 이유는 김명수 대법원장 시절에도 벌어진 일이라서일 터다. 근본적으로 초고화질(Full HD) 입력장치(실물화상기)라야 검찰 조서가 보인다고 했지만 전국 법정 출력장치(빔프로젝터)는 표준화질(SD)이 대부분이다. 다리가 걸리적거린다는 이유로 실물화상기를 교체할 상황이 아니다.

의혹은 여전히 산더미다. 가령 대법원은 2013년 전자법정 제어시스템을 구축했다. 특정 사기업이 개발·관리하던 프로그램을 대법원 소유로 바꾸는 일이었다. 국가예산 23억원을 들여 대법원이 소유하게 됐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5년이 지나서도 특정사가 가지고 있다. 법원이 어떤 전자법정 장비를 도입해도 이 회사가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수정한다. 이 때문에 법정장비 공급 사업에서 다른 업체들은 참여하기 어렵다고 호소한다. 이 회사가 법정장비 공급에도 참여하기 때문이다. 다른 회사가 어렵사리 물품공급을 따내도 이 회사가 늑장을 부리면 지체보상금을 법원에 내야 한다. 업계에서는 “국가가 소유한 프로그램 코드를 특정사가 소유, 수정, 배포하는 경우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다”면서 “대법원이 국가예산 23억원과 물품공급 사업권을 특정사에 상납한 셈”이라고 말한다.

지난 10년간 법원행정처 판사들이 권력과 야합해 재판을 거래하는 동안, 법원행정처 직원들은 업자와 결탁해 국가시스템을 팔아넘긴 의혹을 받고 있다. 양승태 대법원이 실패한 계기가 ‘상고법원 게이트’라면, 김명수 대법원이 실패할 이유는 ‘전자법정 게이트’다. 시인 최영미는 “피기도 전에 시드는 꽃들을 집요하게, 연민했(다)”고 했다. 나도 김명수 대법원을 연민한다. 집요하게.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seirot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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