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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며칠 싸늘한 바람이 지나더니 결국 감나무도 모든 잎을 내려놓았습니다. 감나무는 잎을 다 지운 모습이 오히려 정겹고 포근합니다. 잘 익은 빛깔의 감이 달려있기에 그렇습니다. 가지가 처질 정도로 주렁주렁 달리면 분위기가 덜합니다.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를 두고 감이 달려야 멋집니다.
산에 다니다 보면 어찌 이토록 깊은 곳까지 감나무가 사는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답은 금방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나 동물의 작품입니다. 배낭에 감 몇 개를 넣고 깊은 산속까지 스며든 약초꾼이 씨를 두고 올 수 있겠고, 마을에 내려온 야생 동물이 감을 먹고 다시 산속으로 들어와 배설한 경우일 것입니다. 실제 이 즈음 멧돼지의 배설물에는 감씨가 많이 섞여 있습니다.
멧돼지가 어둠을 틈타 민가까지 내려오는 것은 예전에도 있었던 일입니다. 감도 먹고 갔고 밭작물도 훔쳐갔습니다. 하지만 “그래. 너희들도 먹고살아야지” 하며 넘어가줄 수 있는 정도였으나 지금은 형편이 다릅니다.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2011~2015년) 야생동물로 인한 농작물 피해액은 600억원이 넘습니다. 동물별로 보면 2015년의 경우 총 피해액 90억원 중 멧돼지로 인한 피해액이 47억원으로 절반을 넘습니다. 피해액 90억원에 대한 느낌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하지만 피해 당사자에게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작물에 대한 피해뿐만 아닙니다. 멧돼지가 도로에 뛰어들고 도심까지 습격하여 인명이 상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최근의 멧돼지 출몰관련 사건·사고 기사 제목입니다.
“심야 도로에 멧돼지떼 ‘우르르’…차에 치여 2마리 죽어(10월5일)” “아파트단지에 멧돼지 출몰…30분 만에 사살(10월8일)” “아파트 단지도 접수한 공포의 멧돼지…시민 간담 ‘서늘’(10월11일)” “도심 산책로서 멧돼지 네 마리 출몰…한 마리 사살(10월13일)” “영동고속도로서 멧돼지 출몰로 4중 추돌 발생 5명 다침(10월14일)” “대학교 도서관서 난동 부린 멧돼지 ‘사살’(10월14일)”. 2017년 10월만 보더라도 멧돼지는 실제 하루가 멀다하며 도로나 도심으로 뛰어들고 있습니다. 밤낮도 가리지 않습니다.
멧돼지 성체는 몸길이가 180㎝에 이르며 무게는 300㎏까지 나갑니다. 몇 해 전, 비무장지대에서 250㎏은 족히 나갈 멧돼지와 맞닥뜨린 적이 있습니다. 10m 정도의 가까운 거리였습니다. 몸집이 꼭 황소 같아 보였습니다. 나무 뒤에 얼어붙은 채로 있었지만 더군다나 7마리의 어린 새끼를 데리고 있었으니 조금이라도 움직였다면 멧돼지의 돌진을 피할 길은 없었을 것입니다.
멧돼지는 무리를 이루어 다닐 때가 많습니다. 무리는 암컷과 새끼로 구성되며, 짝짓기가 끝난 수컷과 새끼가 없는 암컷은 홀로 생활합니다. 한곳에 머물지 않고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는 습성이 강하며 산에 먹을 것이 없으면 경작지로 내려오기도 합니다. 힘센 주둥이와 송곳니로 땅을 파헤치면서 먹이를 찾을 뿐만 아니라 하나를 다 먹지 않고 또 다른 것을 먹기 때문에 옥수수, 고구마, 감자, 배추 같은 밭작물은 쑥대밭이 되기 십상입니다.
멀리서도 사람의 체취를 알아차리고 몸을 피하는 멧돼지가 도심까지 내려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끝없는 개발로 산은 점점 좁아지는데 멧돼지는 숫자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멧돼지는 7~8마리의 새끼를 낳지만 많게는 11마리까지도 낳습니다. 환경부 자료에 따르면 2011년 35만마리였던 멧돼지는 2016년 45만마리가 됩니다. 불과 5년 사이에 10만마리가 늘어난 것입니다.
도로에 뛰어들고 도심을 습격한 멧돼지의 몸무게는 80㎏ 내외로 어미로부터 갓 독립한 개체들이 많습니다. 곧 겨울이 되면 멧돼지는 짝짓기 철을 맞습니다. 성체 멧돼지가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기에 분주한 때입니다. 어린 녀석들은 영역 다툼에서 밀려나기 마련입니다. 깊은 산에서 밀려나 산비탈의 밭을 기웃거려 보지만 높은 전류가 흐르는 울타리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도로와 도심 말고 달리 갈 곳이 없습니다.
멧돼지가 도심으로 뛰어드는 것의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호랑이, 표범, 늑대처럼 멧돼지의 숫자를 자연스럽게 조절해줄 친구들을 멸종의 길로 내몬 책임이 가장 큽니다. 저들이 우리 땅에 다시 깃들게 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야 합니다. 자연에 있는 것은 그 자리에 그대로 두어야 합니다. 도토리와 밤 한 톨 안 가져오는 것이 무슨 효과가 있느냐고 말합니다. 효과의 크고 작음을 말할 여유가 없습니다. 산을 밀어붙여 도로나 도시를 건설할 때 조금 더 앞을 내다보며 신중해야 합니다. 불편함이 크지 않은 국도 옆으로 4차선 자동차 전용도로를 내더니 얼마 뒤 또다시 바로 옆으로 고속도로가 생깁니다. 적어도 4차선 자동차 전용도로의 건설은 줄일 수 있었습니다.
그렇더라도 결국 멧돼지를 향해 총을 겨누는 일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정부와 지자체는 10여년 전부터 사살을 통해 멧돼지 개체수를 줄이고 있습니다. 2009년에 6325마리를 죽였습니다. 2011년에는 1만마리 넘게 죽였습니다. 2015년에는 2만1782마리를 죽였습니다.
사진은 멧돼지 가족의 모습입니다. 먹을거리를 찾아 강을 건너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어미 먼저 수심이 얕은 곳을 따라 강을 건넜다 다시 돌아가 새끼 모두를 안전하게 안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저 가족을 향해 총을 쏴야 합니다. 엽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은 엽사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입니다.
<김성호 | 서남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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