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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에 맞지 않은 행동이나 차림을 뜻하는 속담에 ‘벌거벗고 환도 차기’가 있습니다. 환도(環刀)는 전투나 호신용 긴 칼을 말합니다(조선의 주력 무기는 활이었기 때문에 칼은 전투에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1미터 내외로 짧았습니다). 무인(武人)도 전시가 아니라면 칼만 차고 다녔겠지요. 그리고 벌거벗고는 칼을 찰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벌거벗고 환도 찬다고 했을까요? 뭐, 사람이 경황없으면 그런 어이없는 행동도 하겠지요. 무인이 외간여자와 정사를 벌이다 남편이나 식구가 와서 허둥지둥 옷과 물건 챙기는 장면을 상상해봅니다.

같은 속담으로 ‘벌거벗고 은가락지 낀다’가 있습니다. 쌍으로 된 가락지는 유부녀가, 한 짝인 반지(斑指)는 미혼여성이 끼었습니다. 유부녀가 왜 옷도 안 입고 가락지부터 끼었을까요? 앞서의 벌거벗고 환도 차는 상황과 겹쳐보면 쓴웃음이 나올 겁니다. 게다가 ‘이왕 맞을 거면 은가락지 낀 손에 맞아라’처럼 비싼 은가락지는 지체 높은 집안 유부녀가 끼었지요. 연암 박지원의 <호질(虎叱)>에는 높은 학문과 덕행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북곽 선생과 성이 다른 다섯 아들을 둔 열녀 과부 동리자가 나옵니다. 그 둘이 서로 밀회하다 들켜 북곽 선생이 황급히 도망치는 와중에 똥구덩이에 빠집니다. 똥투성이로 기어 나오는 그를 본 호랑이는 덜덜 떠는 북곽 선생을 밤새 꾸짖기만 할 뿐 더러워서 잡아먹지도 않고 가버립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맞는 위신을 지키려 고급 차와 멋진 옷을 갖춥니다. 하지만 허리에 찬 칼과 손가락에 낀 은가락지는 품격을 더할 뿐 품격의 실체가 아닙니다. 말과 행동이,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진짜 품격을 기르는 데는 무심하면서 저질스러운 속내를 돈과 지위로 고급스럽게 가릴 수 있는 자기 능력만 자랑스러워합니다. 온갖 남의 깃털로 화려하게 치장한 까마귀처럼 말입니다.

<김승용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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