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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세상의 주인은 곤충이다. 곱등이, 노린재, 집게벌레 등이 지구의 주인이라니 불쾌감이 치솟겠지만, 지구 환경을 만들고 인류를 선택한 것은 곤충이다. 

공룡시대에서 포유류 전성시대가 된 것도 단지 하늘에서 날아온 불덩어리 덕분만은 아니라고 한다. 거대 고사리 대신 화분식물이 지구를 뒤덮어 포유류들이 먹고살 수 있게 해준 것도 벌, 나비, 파리와 같은 곤충들의 수분활동 때문이라고 한다. 내가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과학자들이 그렇다고 한다. 

아무튼 우리의 착각과 달리 우리가 곤충들을 선택한 게  아니라  곤충들이 우리를 선택한 것이다. 곤충은 지구 환경도 바꾸고 있다. 예를 들어 더 이상 석탄이 만들어지지 않는 것은 흰개미 등이 나무 잔해를 분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게다가 전체 곤충의 90%는 익충이라고 한다. 각종 유기물을 먹어치우고 분해해서 지구를 쓰레기더미에서 벗어나게 한 것도 곤충이다. 곤충이 못 먹는 플라스틱으로 인해 지구가 이 모양 이 꼴인 것을 보면 곤충이 얼마나 감사한 존재인지 알 수 있다.

지구에서 가장 위협적인 동물도 곤충이다. 사자, 호랑이, 코끼리, 코브라 따위가 강력하다고 하나, 이들에 의해 매년 죽어가는 사람은 불과 몇 십, 몇 백에 불과하다. 반면 곤충은 상비군 격인 모기 하나만 해도 매년 인류 50만명을 학살한다. 파리, 빈대, 진드기, 바퀴벌레까지 나설 것도 없다. 차포 떼고 졸만으로도 페이커급의 슈퍼플레이를 하는 셈이다. 

물론 사람을 많이 죽였다고 하여 벌레를 나쁘게 볼 수는 없다. 만약 그렇다고 치면 사람이 가장 나쁘다.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인 동물은 다름 아닌 사람이다. 그래서 곤충을 퇴치하는 회사보다 사람을 퇴치하는 무기회사가 더 많은 것인지도 모른다.  

곤충은 미래산업의 주역이다. 곤충으로부터 신소재를 만들고, 불치병 치료제도 만든다. 미래의 단백질 공급원도 곤충이 대체할 거라고 한다. 밀웜과 같은 곤충식품만 먹어도 환경문제가 완화될 수 있다. 인간이 소만 먹지 않아도 매년 1500억㎏ 이상의 메탄을 줄일 수 있다. 게다가 더 이상 오리에게 유황을 먹이지 않아도 된다. 

우리나라도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곤충시대에 진입하고 있다. 정확히는 벌레시대가 더 적합하겠다. 벌레를 숭상하고 흠모하는 움직임은 곳곳에서 감지된다. 단적인 예로 우리는 서로를 벌레로 분류하고 있다. 틀딱충, 맘충, 한남충, 급식충, 애비충, 설명충, 진지충 등등… 거의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벌레로 분류된다. 혹자는 이것이 모욕적인 혐오표현이라고 하는데, 참으로 인간 중심주의에 빠진 고루한 단견이라 아니할 수 없다. 맘충, 틀딱충 등등이 혐오표현이라면 스파이더맨, 앤트맨도 혐오표현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아이를 길러내는 엄마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산업화를 이룬 어르신들의 공덕을 곤충의 초인적인 능력에 빗대어 맘충, 틀딱충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도 납득하기 어렵다면 ‘버러지만도 못한 놈’이라는 말을 떠올려보라. 벌레가 사람보다 낫다는 방증 아닌가. 게다가 ‘나는 개똥벌레’ ‘난 이제 지쳤어요, 땡벌’이라고 스스로나 사랑하는 상대를 벌레에 빗대어 노래 부르기도 한다. 물론 메퇴지, 쿵쾅이, 검새, 기레기와 같이 안타깝게도 곤충에 이르지 못하는 부류들도 있다. 분발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를 벌레로 부르는 이유가 ‘상대를 비하하고,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증오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다. 우리는 기초교육을 통해, 갈등과 이견은 사회 규범을 조절하거나 만들어내고, 연합과 제휴를 통해 구성원 간의 유대를 길러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배웠다. 

일부의 문제를 전체 부류의 문제로 일반화시키는 것은 권력의 음모이고,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벌레라고 부르면서 박멸과 혐오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우리 모두가 벌레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벌, 개미와 같이 철저하게 조직화, 분화된 진사회 동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견도 없고 번뇌와 고통도 사라지고 하나의 목적과 조직을 위해 철저하게 복속하고 그것이 존재의 목적이 되는 통제된 사회가 될 것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소통은 사라지고, 걸러지지 않으나 사실상 검열된 정보와 선동의 흐름만이 교환되게 될 것이다. ‘우리를 반대하면 친일파 혹은 빨갱이’라는 기적의 논리나 ‘나만이 정의’ ‘국민은 옳다’는 식의 사상의 포르노가 횡행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그것들의 잘못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 분위기와 증오의 격류에 휩쓸려 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니체도 ‘착각은 개인들에게는 기이한 일이 되지만 집단, 당파, 민족, 시대의 경우에는 엄연한 규범이 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맘충, 틀딱충, 한남충 등은 혐오의 표현이 아니어야만 한다.

<김웅 대검찰청 미래기획형사정책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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